항일무명용사위령비

4

주소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5-183
탐방로그
부산 강서구 녹산동 5-183 녹산콘크리트 앞 소공원 내 항일 무명용사 위령비를 찾았다. 강서구 생곡동 산 6-1 처녀골 입구 왕복도로 가운데에 있던 사적인데, 2017년에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해방을 몇 시간 앞두고 일본 헌병들에게 쫓기다 자결한 한 무명용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라고 하는데,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부산 강서구 녹산동 5-183 녹산콘크리트 앞 소공원 내 항일 무명용사 위령비를 찾았다.
항일무명용사 위령비
항일무명용사위령비 – 국가보훈처지정현충시설
관리번호 : 40-1-24 / 관리자 : 녹산향토문화관장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 우리고장 녹산동 장락포 모롱이 산 중턱에서 왜놈 헌병에게 쫓기던 일본군 소속 조선청년이 투신하여 죽음을 택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가덕도에는 외양포에 일본 육군 포대가 있었고, 천성과 등대쪽에는 일본 해군이 그리고 성북동 쪽에는 일본군 육전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중 어느 부대의 소속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청년 한 사람이 야밤을 이용하여 병영을 탈주, 10리 바다를 헤엄쳐 건너서 새벽녘에 송정 바닷가 석축(염전뚝)에 닿아 방근, 화전, 녹산 마을을 지나 성산2구의 한 민가에 들러 밥을 달라하여 허기를 면한 후 일본 헌병이 추격해 오고 있음을 알고 다급히 강변(서낙동강) 길을 따라 달렸으나, 부치는 기운과 들리는 총성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장락포 모랭이 산기슭 절벽으로 올라가서 총을 쏘는 일본병과 대치하다가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목이 터져라 크게 부르고 그 절벽에서 떨어져 장열하게 죽음을 택하고 말았다. 그때의 시간이 오전 10시! 그 시신은 거적에 덮여 헌병들의 들것에 실려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그 시간 그 곳을 지나던 지역주민들 다수가 현장을 목격하고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그 때의 상황을 그들의 입으로 전하여 오늘에는 전설과도 같은 안타까운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그 청년의 고향도, 성도, 이름도 모른 채...!! 이에 산화한 그 분에게는 미안하고, 일본군 헌병에게는 분노를 또 한 번 느낀 수많은 이 곳 지역민들은 이제는 그냥 넘길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차,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늦었지만 구천을 헤매고 있을 그 영혼을 위로하고, 추모해야 한다는 뜻있는 지역 주민들과 본 녹산향토문화관에서는 '항일무명용사위령비'를 세우고 해마다 광복절에는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抗日無名勇士慰靈碑(항일무명용사위령비)
抗日無名勇士慰靈碑(항일무명용사위령비)
抗日無名勇士慰靈碑(항일무명용사위령비)
비문
장락포 도는 모랭이에는 오늘도 바람이 분다.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 그날 하루 태양이 뜨겁던날 처녀골 바위절벽에 꽃한송이 낙화되어 떨어진다.
일헌의 총뿌리 뒤를 쫓고 큰 강이 앞을 막아 결연히 장렬한 산화하다. 그대 마지막 절규는 아! 「대한독립만세....대한독립만세!」 준수한 용모 불꽃튀는 안광이여 이슬처럼 영롱하던 조선의 아들아! 타는 가슴 조국에 바치고 싶었어라 끓는 피 맥박은 독립으로 뛰었노라 안타까워라 그 날 정오 강산에 해방이 왔다.
광복50년! 조국이 일제의 사슬을 풀고 독립된지도 반세기가 흘렀건만 아직도 고혼은 구만장천 허공을 떠돌고 있는가?
이름도 고향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여기 봉화산의 성봉기슭 순절의 현장에서 「항일용사」로 이름짓고 향민의 뜻을 모아 진혼의 탑을 세우나니 영면하소서. 연연세세 추모의 향불 짚이리다.
후대여! 부디 민족을 가슴에 새기고 작은 실천으로 향토를 사랑하자.
1995년 8월 15일
글 토성 황규성 짓고, 목원 배치환 쓰다
비를 세움

아득한 역사만이 역사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작은 기록 하나도 다음 대에 훌륭한 역사가 된다.
보잘것 없는 돌 한덩이 올려놓는다고 생각치 말자.
돌 위에 세월의 풍우가 지날때면 지나던 나그네 발길을 멎고
「녹산」은 맑은 문화의 고장으로 자리하리.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기념
비 건립위 : 위원장 이경우, 전경호
기획.주관 : 녹산향토문화관
해방(解放)되던 그날
우리고장 녹산면에 군인이 절벽에 떨어져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는 왜놈 헌병에 쫓기던 한 조선청년이었고 피투성이된 시신은 꺼지기 들것에 실려 어디론가 갔다. 2시간뒤 그날 정오(正午)에 해방이 되었다. 고향도 성(姓)도 이름도 모른다. 「큰 키에 좀 마른 얼굴 누리끼리한 일본수병의 옷을 입었고 어깨에는 옷 보제기 같은 걸 짊어젔더라」고 했다. 해방의 감격과 안타까운 이 비운의 죽음은 그날 이후 50년! 지금은 잊혀가는 전설(傳說)로 묻혀있다. 「당시 가덕도의 양포에는 일본육군포대가 있었고 천성과 등대 쪽에는 일본해군이 주둔하고 있어 아마 이 병영을 밤중에 탈주해 십리 바다를 헤엄쳐 건너 새벽녁에 송정 바닷가 석죽(염전둑)에 닿고 송전→방근→화전마을 바닷가를 따라 녹산→성산에서 한집에 들러 아침 요기로 허기는 면했건만 이미 왜놈 헌병은 뒤를 추격해 오고 있었고 그는 다급히 강변(西(서) 낙동강)길을 따라 달아나다 힘은 부치고 총성은 절박하다 하는 수 없어 장락포 모랭이(처녀골 입구)에서 산으로 기어올라 절벽 낭떨어지에서 총을 쏘는 헌병과 대치하게 된다. 이때가 오전 열시경 진퇴양난이요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마침내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부르고 투신 장렬한 항일(抗日)의 죽음을 택했다」
(향내) 협찬록
강세우 김정규 서정암 이원재 조용원 강호영 김종열 송쌍복 이재일 (시의원) 권팔도 김종택 송양환 이정호 조정순 김갑순 김태도 신동철 이충부 조판규 김경호 김형규 신흥기 이홍우 주제원 김국정 노재섭 양국태 장경근 최영근 (구의원) 박삼룡 양주동 정질감 최외술 김기철 박상기 엄익권 정진오 최위환 김도성 박영식 윤종형 정정율 최중해 김동상 박춘식 이경우 정진판 허만주 김동혁 배남수 이동우 정호영 홍병주 김동호 배승한 (녹산동장) 조동진 황경태 김상호 배종두 이방우 조문제 황규성 김영근 배치환 이상철 조복등 황남규 조일제 황수균

(향외)
강혜숙 김진옥 신무태 김선권(강서산악회장) 정상근 김승태(부국제강(주) 전 회장) 김부근, 김융행(구의원) 배병희(구의회의장) 주영원(한국통신공사경남경찰국장)
기관·단체
국회의원 송두호 강서구청장 배응기 녹산국민학교총동창회 녹산초등학교 제26회 동기회 녹산동사무소 녹산통장단회 녹상상우회 (주)동진공영 방근마을 삼성건설(주) 송정마을 홍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