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전광역시 중구 침산동 산30-28
- 탐방로그
- 대전 중구 침산동 6-7 그리고 산 15-5 도로변 애국지사 박종병 묘소 안내판을 찾았다.다리 건너편으로 넘어가니 또 다른 '애국지사 박종병의 묘' 라는 안내판이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또 다른 안내판이 있었다. 묘 바로 앞에도 커다란 안내판이 있어 찾아가는 데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립유공 애국지사 박종병 (1889.7.13. ~ 1971.9.1.)
대전광역시 중구 침산동 출신으로 1919년 김직원(金直源)과 3.1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동하였다. 1919년 4월 18일 대전 장터에서 400여 명의 군중이 모이자 이것을 기회로 태극기를 제작하여 군중에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불법시위를 선동하고 주동했다는 죄목으로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언도받았고, 5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이 언도되어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목숨걸고 나라 사랑한 애국지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받들고 게승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이 묘소 안내판을 설치하여 드립니다.
대전광역시 중구 침산동 출신으로 1919년 김직원(金直源)과 3.1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동하였다. 1919년 4월 18일 대전 장터에서 400여 명의 군중이 모이자 이것을 기회로 태극기를 제작하여 군중에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불법시위를 선동하고 주동했다는 죄목으로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언도받았고, 5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이 언도되어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목숨걸고 나라 사랑한 애국지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받들고 게승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이 묘소 안내판을 설치하여 드립니다.
愛國志士 朴公 宗秉 之墓(애국지사 박공 종병 지묘)
공의 휘는 종병이오, 성은 박이니 충주인이다. 공은 회령대도호부사 제함의 후손으로서 한말 쇠망지제에 태어나 평생을 험조생활로 한빈에서 광복운동에 반생을 바친 애족지사이다. 공의 선친 휘 영태와 선비 진주강씨 사이에서 고종 27년 기축 7월 13일에 생하니 용위비범한 선비 상이었다. 신장 5척 반에 야무진 체격 금성옥진한 음성과 샛별같은 눈동자는 압인지기가 풍겼다. 일찌기 한학을 공부하다가 경술국치를 당함에 피끓는 울분을 억제할 수 없어 뜻있는 지사들과 우심초초로 일과를 보냈다. 기미년 3.1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제히 일어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를 벌리다 왜경의 총칼에 무참히
공의 휘는 종병이오, 성은 박이니 충주인이다. 공은 회령대도호부사 제함의 후손으로서 한말 쇠망지제에 태어나 평생을 험조생활로 한빈에서 광복운동에 반생을 바친 애족지사이다. 공의 선친 휘 영태와 선비 진주강씨 사이에서 고종 27년 기축 7월 13일에 생하니 용위비범한 선비 상이었다. 신장 5척 반에 야무진 체격 금성옥진한 음성과 샛별같은 눈동자는 압인지기가 풍겼다. 일찌기 한학을 공부하다가 경술국치를 당함에 피끓는 울분을 억제할 수 없어 뜻있는 지사들과 우심초초로 일과를 보냈다. 기미년 3.1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제히 일어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를 벌리다 왜경의 총칼에 무참히
죽어갔다. 이 참상을 보다 못하여 지우 김직원 지사와 모의 그해 4월 1일 대전시장에서 수천 군중과 더부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 격렬한 시위를 벌리다가 출동한 일본순사 헌병군대가 마구 쏘와대는 총탄에 동지 정대귀 방춘실 외 수명이 순사하고 많은 사람이 부상을 입었으며 공은 김공과 같이 주동자로 피체되어 동년 4월 18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2년 여형을 받았고 그 후 출소하여 일본으로 역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인년에 귀국 고향인 점촌에서 은둔생활로 생계를 돌보는 중에도 일헌의 감시와 핍박이 극심하여 중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박씨 문중에서는 18대 종손이며 독자의 몸이라고 만류하여 고향에서 은거 절망의 나날을 보냈다. 천운이 회태하여 을유 양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을 보게 되였다. 왜정 36년 학정이 풀리어 방방곡곡에서 만세소리는 비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공은 이러한 기쁨을 맞았으나 그간 독립운동하다 피체되어 영어생활에서 모진 고지를 당한 여독으로 고생 신음하다가 1970년 경술 9월 12일 서거하니 점촌 상화봉 오좌에 안장하였다. 초배는 은진송씨요, 계배는 강릉김씨니 모두 합부하였다. 자는 5남 1녀니 희준과 희증 희균 희장 희돈이요, 서는 오재영이고 손은 봉기 외 10종 형제니 내외손 남녀 29인이나 이에 다 기록할 수 없다. 나의 지우 희준보 그 선친의 현창 표석을 국가에서 세움에 그 갈문을 부탁하기에 내가 공을 승안한 바와 그 사략을 쓰고 나라에서 공에게 추서한 건국훈장 애족장 제268호 훈장을 이에 새기노니 왈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족장 1990년 8월 15일 대통령 노태우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족장 1990년 8월 15일 대통령 노태우
서기 1990년 경오 9월 일
대전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안동인 권영달 근찬, 경주인 김동일 근서
희준 희증 희균 희장 희돈, 서 오재영, 손 봉기 창기 동기 남기 성기 찬기 은기 광선 민기 석기 복기, 손녀 현주 은미 은경 연정 선주 미란 근자 근정 혜란 근희, 손서 김태곤, 외손 오일택 순택 천택 효택 제택
대전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안동인 권영달 근찬, 경주인 김동일 근서
희준 희증 희균 희장 희돈, 서 오재영, 손 봉기 창기 동기 남기 성기 찬기 은기 광선 민기 석기 복기, 손녀 현주 은미 은경 연정 선주 미란 근자 근정 혜란 근희, 손서 김태곤, 외손 오일택 순택 천택 효택 제택
대전 중구 침산동 6-7 그리고 산 15-5 도로변 애국지사 박종병 묘소 안내판을 찾았다.
-> 0.8km
독립유공 애국지사
박종병 안장지
독립유공 애국지사
박종병 안장지
다리 건너편이다.
Roadview에서 확인하였던 곳에 또 다른 '애국지사 박종병의 묘' 라는 안내판이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또 다른 안내판이 있었다.
산 위로 올라갔지만 묘는 찾을 수 없었다.
더 위쪽에 묘소의 비석 머리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