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희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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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광지원리 40-1
탐방로그
경기 광주시 중부면 광지원리 40-1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의 추모비를 만났다.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초월읍 신익희 선생의 생가로 가는 중에 예상치 못하게 발견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남의 잘난 것도 인정하여야 하며 나도 잘살려니와 남도 잘살아야겠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이라고 간파하였다.
해공은 소년 시절에 남한산성 내의 광전학교에 통학하였을 때 이 땅을 밟고 다니었고 환국 후 광주를 내왕할 때마다 향우들과 만나 술을 나누며 정담하기를 즐겨하였다. 그러므로 이곳에 공의 추모비를 세워 성실과 청렴과 봉사를 신조로 공직자의 귀감이 되고 한국의 민주주의발전에 이바지한 공의 유덕을 영원히 기리고자 이글을 엮어 비를 세우는 바이다.
서기 1985년 을축 월 일
문학박사 우봉후인 이병도 찬
해공선생기념사업회장 전주후인 유치송 례
성균관총무처장 진주후인 강정희 서병전
해공신익희선생추모비건립위원회 근립
남한산성에서 초월읍 신익희 선생의 생가로 가는 중에 해공 신익희 선생의 추모비를 만났다.
GPS상의 주소는 경기 광주시 중부면 광지원리 40-1이다.
海公 申翼熙 先生 追慕碑(해공 신익희 선생 추모비)
일제 치하에 망명투사로 언론과 풍채가 출중하고 광복 건국 후에 온 국민의 추앙을 받은 이가 있었다면 그는 바로 고 해공 신옹이라고 하겠다. 공이야말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 구비한 이로 거대한 자취와 깊은 인상을 남기고 간 이었다. 그의 이름은 익희 자는 여구, 관은 평산이니 해공은 자호였다. 그의 선대에는 각공신경이 연다라 나왔으며 그의 선고도 벼슬이 자헌대부 장례원경에 이르렀다. 해공은 국내외로 다사다난하던 고종 갑오 즉 1894년 9월에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휘 단의 제5남으로 태어났다. 명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대에 이미 한문 경전을 통독하고 그 후 서울로 올라와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여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조도전대학(와세다대학) 고등예과를 거처 학부의 정경대학에 압학하였다. 이때는 조대 우리 유학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때니 동학과동급에는 양원모 동학과 상급에는 장덕수 철학과에는 최두선 고등예과에는 현상윤 김전제등등의 수재가 있었던 까닭이다. 공은 1917년에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의 교수로 취임 후학자도에 전력하였다. 1919년에 임규, 최린, 최남선, 윤홍섭, 송진우 등과 더불어 3.1독립운동을 모의 거사한 뒤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투사들과 같이 임시정부 수립에 진력하였다.
그리고 그는 중국인에게 순망치한 다음에는 그들의 차례가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거의 중국전역을 돌아다니며 중국 유지들과 공동 대처할 것을 설득하였다. 마침 해공은 일본 유학 당시의 지면인 중국지방군벌 호경익독군의 고문으로 육군중장을 ○○하고 있게 되었는데 그는 이를 기회로 한중로 3국의 청년정예 천수백명을 선발 분용대를 편성하고 유사시에 대비하려고 하였다. 그 후 그는 상해로 되돌아와 임시정부의 내무부장에 취임하였다. 1931년에 일제가 만주를 탈취하여 제2의 ○○를 삼고 1937년에는 북중국을 침략하려 하여 중일전쟁을 일으키었다. 일본은 북경을 함락하고 작지를 석권하면서 남경을 또 함락하니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를 따라 중경으로 옮기어 함께 지구전으로 항쟁하였는데(1938) 이듬해 마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일제는 독,이와 함께 동맹하여 미영불로 등 연합군에 대항하다가 1945년 8월 14일에 패망하자 우리는 마침내 8.15해방으로 환호를 부르짖었다. 그해 12월에 임시정부요인들이 비로소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니 해공도 함께 입국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국민대학을 창설하는 한편 언론기관인 자유신문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반탁과 반공에 앞장서고 정치공작대등을 조직하여 모든 힘을 민주국가 건설에 바치었다. 미소양국과 여러번 협의하고 남북통일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하였으나 소련 공산진영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48년 UN결의에 의하여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실시하게하여 우리 남한은 합법적절차를 밟아 이해 5월에 국회를 열고 헌법을 제정하였다. 의원의 다대수의 찬성으로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보게 되었다. 앞서 해공은 고향인 광주에서 출마 무투표로 당선되고 국회에서 의장에 추대되었다. 해공은 의장 6년동안 의회정치의 민주화를 위하여 전력하였으며 그의 언론 풍채와 수완은 각 의장으로서 높이 평가되었다. 1956년 5월 3대 대통령 선거 때에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이달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정견발표를 하였는데 청중이 무려 근 백만에 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가 63세로 피로가 극심한 중에 계속하여 호남 유세차 내려가던 중 홀연이 열차 내에서 졸도 서거하니 때는 1956년 5월 5일이었다. 부음이 전하자 일반 국민들은 놀래 통탄치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고인의 영구가 서울에 돌아오매 수십만 국민이 역까지 출영하여 본제에 이르기까지 도열하여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이달 23일에 성대한 영결식을 마친 후 시내 도봉구 수유동에 안장하였다. 1962년에 정부에서는 공의 건국위공을 추서하여 중장의 상훈이 있었다. 해공은 평소에 대인군자의 풍도를 지녀 대인접물에 매양 화기를 띠고 임하였으나 불의부정에 대하여는 조금도 용서치 아니하였다. 또 그는 말하기를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