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헌(신채호 생가 홍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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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단재 신채호 선생 유허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한 36년간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독립투쟁을 이끈 가장 우뚝한 선열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선생의 본관은 고령이다. 고령신씨는 고려 중엽 문과검교 군기감을 지낸 신성용공을 시조로 하고 8세 문총공 신숙주선생에 이르러 문벌이 크게 번창하였으며 단재 선생은 한글창제에 공이 컸던 문충공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18대 손이다. 선생은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에서 가난한 선비 신광식공과 밀양박씨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나 궁핍한 유년기를 진외가인 이곳 안동권씨촌에서 보냈다. 1887년 부친이 별세하자 선생은 선조들이 대대로 살고 있던 충청북도 청원군 양성면 귀래리 고두미로 이사하여 한학을 수업했고 1895년 국모시해사건이 일어난뒤 국운이 위급하게 됨을 보고 선생은 1898년 고향을 떠나 상경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으면서 신풍을 일으키기 7년,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나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국민사상의 개혁과 국권수호가 급선무라고 생각한 선생은 박사를 사퇴하고 1905년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역임하면서 준열한 무관의 언관 사관으로서 한말의 풍운과 겨루어 나갔다. 그러나 머지 않아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길 것을 직감한 선생은 1910년 국외로 망명하여 1918년 까지 연해주에서 광복회 부회장, 권업신문 주필을 역임하면서 예리한 필봉으로 민족의 단결을 강조하고 독립운동의 정도를 밝히며 동제사, 대한독립청년단 등의 조직에 참획하였고 대동단결의 선언, 대한독립선언문 등을 기초 발표하였다. 선생이 망명한 뒤 상해로 북경으로, 만주로 수만리를 편답하면서 첫째 소원은 조국의 광복이었고 다음은 일제 식민관에 의해 말살되어 가는 민족사의 근원을 찾아 단군 이래 맥맥히 이어온 민족정기를 천추에 전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때묻은 청포 하나 몸에 걸치고도 웃으면서 만주 각지를 누볐고 우리나라 엣 강역을 찾아 광개토대왕비 탐사를 비롯해 우리 역사에 관계된 사적을 탐구하는데 온 힘을 기우렸다.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서게 되자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 전원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정부의 방향을 제시했고 신대한의 주필로 독립운동의 정신과 이념적 지표를 제시하는 동시에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일깨우는데 힘썼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론이라 할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선생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하여 아는 곧 한국, 민족이었고 비아는 이민족이었으니 선생의 한국사는 한민족과 이민족의 투쟁사로 정의하였다. 1920년에서 1927년 사이 선생은 대일무력항쟁의 계획으로 북경에서 군사통일책진회를 조직하고 제2의 보합단을 조직하였으며 위임통치제원을 통박하는 성토문과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을 기초 발표하는 한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참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독립쟁취운동에 헌신하였다. 1928년 항일독립투쟁의 일환으로 국내에 독립운동의 선전기관을 설립하고 일본인 건축물을 파괴할 폭탄 제조소를 설립할 자금 마련을 위해 대만으로 가서 기강항에 상륙 직전 일경에 피체되어 대연감옥에 미결인로 수감되었다. 투옥 중 공판 심리에서 선생은 일본 제국주의 제도의 부당함과 약소민족인 한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독립운동을 단행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1930년 5월 10년의 실형을 언도받고 여순감옥으로 이감되어 수형 생활을
하던 중 1936년 2월 21일 음 1월 28일 57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일 뿐만 아니라 탁월한 민족사학가로서 독사, 신론,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등 불후의 명저를 남겼고 또한 이태리 건국3걸전,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권도통전 등 전기와 소설 꿈 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 그 밖에 많은 글들을 남겼다. 선생의 유해는 가족들의 손으로 향리에 봉환 안장되었고 1962년 정부에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장하여라 독립정신, 영원하리 민족사관, 번영된 이나라, 편안한 삶 누리는 것은 모두가 선생의 밑거름 덕이었음을 우리 모두 기억하노니 그 고귀한 뜻 천세만세에 빛날 것이다.
단기 4340년 서기 2007년 정해 월 일
고령신씨 대종회 회장 신관식 근수
대한민국 미술대전 제18회 심사위원장 후학 인전 신덕선 근서
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한 다른 사적으로는 충북 청원군에 있는 단재 신채호 선생 묘소 및 사당이 있다.
丹齋 申采浩 先生 像(단재 신채호 선생 상)
건립기
도리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 구국의 일념으로 헌신하신 선각자가 있으니 이분이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이시다. 단재선생은 뛰어난 학문으로 일찌기(26세)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그 깊고 폭 넓은 지식으로 민족사관을 정립하여 고대문화사를 밝혔다.
민족문학의 연구와 강직한 논설을 수없이 발표함은 물론 조국광복을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어려운 길도 주저하지 않았다.
선생은 경술국치(庚戌國恥) 직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자주독립운동을 벌이다 1928년 기륭항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중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57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이렇듯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고장이 낳은 백절불굴의 독립운동가요 뛰어난 사학자이자 문학가이었으며 기개높은 언론계몽사상가 였으니 이에 선생의 의로운 공적과 위업을 알리고 이를 영원히 기리어 그 애국사상을 계승하고자 여기 동상을 세운다.
丹齋 申采浩 先生 像(단재 신채호 선생 상)

건립기

도리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 구국의 일념으로 헌신하신 선각자가 있으니 이분이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이시다. 단재선생은 뛰어난 학문으로 일찌기(26세)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그 깊고 폭 넓은 지식으로 민족사관을 정립하여 고대문화사를 밝혔다.
민족문학의 연구와 강직한 논설을 수없이 발표함은 물론 조국광복을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어려운 길도 주저하지 않았다.
선생은 경술국치(庚戌國恥) 직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자주독립운동을 벌이다 1928년 기륭항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중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57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이렇듯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고장이 낳은 백절불굴의 독립운동가요 뛰어난 사학자이자 문학가이었으며 기개높은 언론계몽사상가 였으니 이에 선생의 의로운 공적과 위업을 알리고 이를 영원히 기리어 그 애국사상을 계승하고자 여기 동상을 세운다.
단재 신채호 생가지 헌성 감사비
단재 신채호선생은 1880년, 진외가인 이곳 도미리마을에서 태어나 충북 청원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위해 애국계몽운동, 신민회활동등으로 일제에 맞섰으며,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중국으로 망명 평생을 독립운동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싸우다 체포되어 1936년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였습니다. 우리시는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 그리고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선생을 기리고자 1992년부터 1999년까지 생가터의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때 안동권씨 사포공파에서는 선대의 유훈을 받들고, 선생의 뜻과 정신을 잇기위해 생가터를 헌성하는 등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특히 사포공 6세손 권용민님은 종중회의의 동의를 이끌어 냈고, 그의 어머니이자 단재선생과 삼종간인 신이호여가는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는데 많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이에 시민을 대표하여 권용민, 신이호님과 안동권씨 사포공파 종중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더불어, 그 뜻을 오래 기리도록 기리고자 이 비를 세웁니다.
丹齋 申采浩 先生 像(단재 신채호 선생)이 태어나신 곳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丹齋 申采浩 先生 生家址)
丹齋精舍(단재정사)
대전 중구 어남동 233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를 찾아가는 길. 생가 입구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유허비가 있다.
생가 입구의 독립유공자 단재 신채호 선생 유허비. 이곳의 GPS 상의 주소는 대전시 중구 어남동 245-2이다.
獨立有功者 丹齋 申采浩 先生 遺墟碑(독립유공자 단재 신채호 선생 유허비)
獨立有功者 丹齋 申采浩 先生 遺墟碑(독립유공자 단재 신채호 선생 유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