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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191
- 탐방로그
- 대전 중구 대사동 191 보문산공원에 문충공 연재 송병선 순국기념비를 찾아왔다. 야외음악당에서 대전지구전승비 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문충공 연재 송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 성낙제
부위원장 최운교 이재서
위원 황모성 이종진 이범희 김수천 지헌영 정달화 김대경 김청운 이동제 신기훈 송공호 송하용 곽철
특별위원 김무동 김연수 송병기
위원장 성낙제
부위원장 최운교 이재서
위원 황모성 이종진 이범희 김수천 지헌영 정달화 김대경 김청운 이동제 신기훈 송공호 송하용 곽철
특별위원 김무동 김연수 송병기
대전 중구 대사동 191 보문산공원에 송병선 순국기념비를 찾아왔다.
야외음악당에서 대전지구전승비 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사적을 찾을 수 있었다.
文忠公 淵齋 宋先生 秉璿 殉國記念碑(문충공 연재 송선생 병선 순국기념비)
文忠公 淵齋 宋先生 秉璿 殉國記念碑(문충공 연재 송선생 병선 순국기념비)
특별찬조 무순
김의창 황운성 임기호 김덕문 이남호 차의영 진형하 김용태 박찬 양순직 김종필 김종갑 이상철 한건수 이상희 인태식 이영진 이상돈 길재호 김성진 류진산 박삼준 방일홍 김세련 김규태 심우섭 강신섭 홍광표 남정섭 박선린 박상동 정상묵 송대순 송석하 정인권 송준용 송재춘 송종호 이규봉 김원경 박상근 손중만 이범래 허염 조삼식 류봉선 임달규 이장우 송병덕 송정순 이영구 문갑동 김정우 하일환 최동주 장광호 남영희 류한경 민병구 신원보 정시익 이태근
김의창 황운성 임기호 김덕문 이남호 차의영 진형하 김용태 박찬 양순직 김종필 김종갑 이상철 한건수 이상희 인태식 이영진 이상돈 길재호 김성진 류진산 박삼준 방일홍 김세련 김규태 심우섭 강신섭 홍광표 남정섭 박선린 박상동 정상묵 송대순 송석하 정인권 송준용 송재춘 송종호 이규봉 김원경 박상근 손중만 이범래 허염 조삼식 류봉선 임달규 이장우 송병덕 송정순 이영구 문갑동 김정우 하일환 최동주 장광호 남영희 류한경 민병구 신원보 정시익 이태근
국가의 성쇠흥망은 민심의 향배에 있고 민심의 향배는 지도자의 의불의에 있다. 영웅 열사의 순국 충절이 능히 민심을 숙연케하여 나아가 민족국가를 부지할 기백을 격동케한다. 고종 을사늑약의 변이 불의도배에 의하여 강행될 때 조충정, 민충정, 홍충정과 대전의 송문공의 장의자결은 국민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의병이 이러나고 구국열사의 피가 끓고 외적에 항거하는 민족운동이 싹트게 되었으니 3.1운동, 광주학생의거 수많은 의사의 장거에 이어 을유해방을 얻은 것이 치열한 광복 운동의 ○산일진대 그것은 선열들의 의혈에 힘입은 바 실로 큰 것이 있는 것이다. 선생은 은율인이니 우암 문정공의 9세손으로 헌종 병신 대전 석남에서 출생 높으신 자질과 천수한 학문으로 사림의 종장이 되시고 묘당의 초선되여 대사헌, 성균관 제주로 체도용의 속왕개래 도학연원을 적전한 국가의 승승이다. 늑약 당시 고종의 소명으로 부벌 토적폐약의 10조 창주가 청허되지 못한채 왜관에 강송되여 국운만회치 못함을 자책하고 유소 시전방인민서를 유서로 광무 9년 을사 12월 30일 석남구택에서 장렬한 최후를 수하였으니 이엊지 천추의 통분사 않이랴. 하늘은 빛을 잃고 산천초목이 슲어하는 가운데 인심은 비절처절 만고에 유한을 남기었다. 을사보호조약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일본침략의 노골화이며 이후 5년 경술에 병탄이 늑행되였으니 민족의 얼을 이여 받은 자 얻지 안연할 수 있으랴. 회고컨대 멀리 백제에는 삼충이 있고 고려에는 정포은이 있고 근세에 와서 송문충공을 비롯 사충이 있다. 신라가 당에 청병하였다하나 국경 회복에 만전을 기하였고 고려가 몽고에 굴하였다하나 국가통치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경술국치는 국가의 명칭마저 없어지고 삼천리 강토가 남의 식민지화 하였으니 오천년 역사에 유례없는 치욕이다. 이럴 결과를 예견한 송문충공이 엊지 통분하지 않으랴. 단종 고사를 보라. 이민족의 침구도 아니오. 국체의 변혁도 아니며 왕가의 변질도 아니지만 사육신 생육신의 불퇴전의 정신을 만고의 충절로 죽백이 조증하거늘 하물며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되는 천고 미증유의 통분사에 있어서랴. 선생은 직위에 종시불취하심으로 통치의 책임을 질 바 아니다. 그러나 오직 국가의 스승으로서 국운 탈회의 길 없음을 통탄하고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하였으니 이 엊지 장하지 않으랴. 우리 역사상의 귀감이며 우리 민족정신의 결정체이며 3천만 한민족의 사표인 것이다. 이에 선생이 성인하신 을사 1주갑을 당하여 경향 각지의 뜯있는 인사들이 모여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정성어린 정재를 모와 ○대산시립공원 제1봉에 높이 기념비를 세우고 선생의 높으신 충절을 만방에 선양하노라.
선생이 순절하시매 고종황제로부터 예장범절과 불특장익 문충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의정이 증직되였으니 희라 선생이 아실니 없다. 끝으로 선생의 의열에 감복되여 사선 최공임이 비분자진하였음을 병기하여 후세에 전한다.
단군기원 4298년 을사 12월 일 후학 창녕 성낙서 찬, 후학 안동 김무동 제, 종후학 송완빈 서
선생이 순절하시매 고종황제로부터 예장범절과 불특장익 문충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의정이 증직되였으니 희라 선생이 아실니 없다. 끝으로 선생의 의열에 감복되여 사선 최공임이 비분자진하였음을 병기하여 후세에 전한다.
단군기원 4298년 을사 12월 일 후학 창녕 성낙서 찬, 후학 안동 김무동 제, 종후학 송완빈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