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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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 산31-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립투사 김용원 선생
이곳은 독립운동가인 김용원(1892~1934) 선생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선생은 원정동에서 태어나 휘문의숙을 마치고 독립운동에 몸바쳐 보은 공주에서 자금을 모으다가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의 경무국원이 되었다. 귀국하여 대동단을 조직하여 의친왕을 상해로 탈출시키려다 실패하였다. 이후 상해와 한국을 드나들면서 끊임없이 항일운동을 했는데 1924년에는 모금을 위한 독립공채를 가지고 귀국하다가 체포되어 2년의 형을 받았다. 그후에는 영주 부석사를 기점으로 활동 중 논산에서 일본경찰을 죽이고 이듬해인 1927년 안동에서 체포되어 복역 중 1934년 43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호는 강산이다.
愛國志士 慶州金公 庸源 之墓(애국지사 경주김공 용원 지묘)
愛國志士 慶州金公 庸源 之墓(애국지사 경주김공 용원 지묘)
愛國志士 慶州金公 庸源 之墓(애국지사 경주김공 용원 지묘)
선생의 자는 중옥 호는 강산 본관은 경주 문정공 송애 김경여의 8대손이며 아버지 도의와 어머니 은진송씨 가문에서 1892년 2월 16일 대덕군 기성면 원정리 덕동에서 태어나셨다. 7세부터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0년 8월 29일 오천년 역사상 유례없는 치욕의 국치를 당하자 항일 구국의 뜻을 품고 1913년 휘문의숙에 입학 신학문을 배우신 후 항일투쟁 동지규합과 군자금 모금을 하다가 1918년 함남지방을 순찰하는 총독을 격살코저 미행 중 왜경에 체포되어 한달만에 석방되었다. 1919년 3월에는 이면호 등과 만세
운동에 참가하셨다가 동년 4월 족제 태원 로원 등과 함께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김구 선생 휘하에서 경무국원으로 활약하고 동년 9월에는 운남군관학교에 입교 군사학을 전수하였다. 1920년 7월에는 임시정부 명령으로 입국하여 김가진 전협이 주도하는 대동단에 가입 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킬 계획을 추진하였고 그후 이면호 김규식과 더불어 한성사령부를 설치 무장 봉기를 계획하였으나 비밀이 탄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듬해 상해로 다시 탈출 임시정부에 종사하며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조직에 가담 1923년 동 후원회의 밀사로 국내에 잠입하여 자금을 조달하다가 체포되어 2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 8개월만인 1925년 신병으로 출옥되여 영주 부석사를 거점으로 영 호남 일대에서 재차 활동 중 1926년 왜왕 소화의 즉위를 앞둔 검속으로 연행되다. 부여에서 왜인 형사를 퇴치하고 논산 양촌면 임화리 양지학집에 피신 국외 탈출을 도모하였으나 왜경에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9년간 복역 중 고문 여독으로 위중하자 1934년 2월 일시 병보석되었으나 끝내 쾌차치 못하고 동년 음 6월 13일 목메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의 한을 품으신 채 파란만장의 생애를 맞치고 영민하시였다. 선생의
영혼이여 정부에서는 선생의 건국사업에 기여한 공을 높이 받드러 후손에게 길이 귀감으로 삼고 추모하고자 1977년 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추서 되였사오니 다시 찾는 햇살을 받으시며 고이 명복하소서
묘소 향방 간좌 곤향으로 모셨음
제 두원 덕원, 자 정두, 손 옥경 윤경 용경 성경, 증손 학선 학신 지미 학남 학수 학준, 고손 종근 종석 종범
1980년 9월 일 대덕군수 박찬무 세움
경주김씨 가족 납골묘
통정대부 경주김공 현석지묘
동지중추부 경주김공 붕운지묘
가족납골묘로 이장하면서 구 묘비를 모아둔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