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섭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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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전광역시 서구 변동 25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수정재
밀양손씨 역승공파 종중
문화재자료 제30호 수정재
순국열사 손양섭 추모비
순국열사 손양섭은 밀양손씨 역승공의 17세손으로 아버지 손병기와 어머니 김재숙의 사이에서 6남으로 1921년 1월 27일에 태어나서 대전중학교를 졸업하고 21세에 일본군 군속으로 강제로 끌려갔다.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과 말레이 상륙을 추진하면서 본격적인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그 후 일본군은 홍콩, 마닐라, 싱가포르, 필리핀 등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전선을 확대하여 연합국 병사 26만 1천명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연합국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일제는 1942년 5월부터 포로수용소 감시요원으로 한국인과 대만인 3,000명을 군속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동원하여 자바에 1,400명, 말레시아에 600명, 태국에 700명, 인천에 265명을 배치하였다. 자바에 군속으
로 온 한인 포로감시원들은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일본군은 이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계속 연장하였다. 한인군속들은 고려 독립청년당을 결성하여 항일의거를 결심하였다. 1945년 1월 4일 한인군속과 포로들을 말레이 방면으로 전속명령이 하달되자 독립당은 1월 5일 이 수송선을 탈취하기로 계획하고 김현재가 총지휘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1월 4일 저녁에 당원 손양섭과 그가 포섭한 민영학과 노병한이 암바라에서 거사를 하였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알바라와 의거는 인도 자바 암바라와 읍에 자리한 자바포로수용소 제3분소 제2분견소에서 일어났다. 1945년 1월 4일 분소로부터 이동명령이 내려와 암바라와 제2분견소에서 6명의 한인군속들이 전출하게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전출자들과 손양섭, 민영학, 노병한은 세마랑분소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탔다. 세마랑으로 가는 도중 손양섭 등 3명은 자동차를 탈취하여 암바라와 분견소의 무기고로 들어가 손양섭은 부켄기관총을 들고 민영학과 노병한은 탄환 3,000발을 가지고 소장관사로 향했다. 무기를 탈취한 3명은 억류소장 스스키 대위를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그리고 형무소로 가서 형무소장을 사살하고 잠복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위기를 모면한 억류소장 스스키 대위는 긴급히 세마랑 분소에 연락하여 응원대의 급파를 요청하였다. 이로서 본소는 물론 자바 사령부까지 보고되어 암바라와 주변은 삽시간에 이중삼중의 삼엄한 비상경계가 펼쳐졌다. 의거가 일어난 첫날밤 형무소장의 사살에 성공한 후 민영학은 하복부와 좌대퇴부의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어 수수밭으로 들어가 소총의 방아쇠의 구두끈을 매고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 자결산화하고, 한편 위생재료 창고로 피신한 손양섭과 노병한은 1월 6일까지 숨어 있다가 이곳을 도저히 탈출할 수는 없다고 판단 차라리 저들의 손에 잡혀죽느니 깨끗이 죽는 것이 낫다하고 서로 방아쇠를 당겨 작렬이 순국하였다. 그들은 3일간의 싸움에서 군인, 군속 일본인 등 1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같은 사실은 국가에서 동남아지역 항일독립운동 실태조사에서 밝혀졌고 후손들의 노력으로 묻혀있는 자료를 수집하고 증언을 녹취하여 이 사실이 세상에 들어나 2008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우리 밀양손씨 역승공파 종중에서는 이러한 훌륭한 선열의 정신을 후손에게 알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의거 67주년을 맞이하여 역승공 묘정에 추모비를 건립하는 바이다.
서기 2012년 10월 일 역승공 17세 종손 호섭이 짓고 밀양손씨 역승공파 종중에서 세우다.
대전 서구 변동 250 밀양손씨 역승공파 종중재실 수정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