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 44-2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연재 송병선 선생과 아우이신 심석 송병순 선생은 각각 헌종 3년 1837년, 헌종 5년 1839년에 대전 석남리에서 탄생하셨다.
그렇다면 이곳은 송병선 선생의 생가지도 되지만, 송병순 선생의 생가지도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송병선 선생의 생가지도 되지만, 송병순 선생의 생가지도 되는 셈이다.
송병선 선생 생가지(宋秉璿 先生 生家址)
조선말의 문신(文臣)이자 우국지사(憂國支士)였던 송병선(宋秉璿)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처음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몸채를 비롯한 사랑채 등 여러 건물들이 1.400여 평의 대지 위에 서 있었으나 그 후 많이 변모하여 한때는 성남장(城南莊)이라는 음식점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장대석(長台石) 기단(基壇) 위에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기와집 1채만 남아있다. 선생(1836~1905)은 우암(尤庵)의 9대손으로 향리(鄉里)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제자 양성에 힘썼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고종(高宗)에게 상소(上疏)하여 시정개혁을 주장하고 일본을 경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일본헌병대에 의해 고향으로 강제 이송당하였다. 이에 망국(亡國)의 울분을 참지 못한 선생은 음독자살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이 추서(追叙)되었다.
조선말의 문신(文臣)이자 우국지사(憂國支士)였던 송병선(宋秉璿)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처음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몸채를 비롯한 사랑채 등 여러 건물들이 1.400여 평의 대지 위에 서 있었으나 그 후 많이 변모하여 한때는 성남장(城南莊)이라는 음식점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장대석(長台石) 기단(基壇) 위에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기와집 1채만 남아있다. 선생(1836~1905)은 우암(尤庵)의 9대손으로 향리(鄉里)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제자 양성에 힘썼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고종(高宗)에게 상소(上疏)하여 시정개혁을 주장하고 일본을 경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일본헌병대에 의해 고향으로 강제 이송당하였다. 이에 망국(亡國)의 울분을 참지 못한 선생은 음독자살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이 추서(追叙)되었다.
연재 송병선 생가지
이 건물의 건립기념비에도 같은 내용을 적고 있다.
건립 기념비
이곳은 조선 말기 우국지사 송병선 선생(우암 6대손)이 태어난 곳으로 6.25사변 당시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께서 일시 머물던 성남장 자리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북대전 신용협동조합의 여러 조합원들이 자조, 자립, 협동의 정신으로 잘살기 위한 경제운동, 사회를 밝힐 교육운동, 더불어 사는 윤리운동의 터전으로 이 건물을 세우게 된 것이다.
1993.12.31.
이곳은 조선 말기 우국지사 송병선 선생(우암 6대손)이 태어난 곳으로 6.25사변 당시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께서 일시 머물던 성남장 자리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북대전 신용협동조합의 여러 조합원들이 자조, 자립, 협동의 정신으로 잘살기 위한 경제운동, 사회를 밝힐 교육운동, 더불어 사는 윤리운동의 터전으로 이 건물을 세우게 된 것이다.
1993.12.31.
대전 동구 성남동 44-27 대전동부신용협동조합 앞에 있는 송병선 선생 생가지비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