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881-3
- 탐방로그
- 대구 중구 동산동 881-3 대구제일교회 옆 3.1운동계단을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계성학교
대구 최초의 미국 선교사인 아담스 목사가 사택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대구 3.1운동 당시 계성학교 학생들이 이 건물 지하실에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하였다.
대구 최초의 미국 선교사인 아담스 목사가 사택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대구 3.1운동 당시 계성학교 학생들이 이 건물 지하실에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하였다.
고종황제 서거로 3.1운동 신호탄
고종황제 운구가 장지로 떠난 후 서울 대한문 앞에서 만세와 시위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결국 고종황제 서거가 3.1운동의 신호탄이 된 것이다.
고종황제 운구가 장지로 떠난 후 서울 대한문 앞에서 만세와 시위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결국 고종황제 서거가 3.1운동의 신호탄이 된 것이다.
남성정 예배당(현 제일교회)
1908년 건립한 대구 3.1운동 당시의 제일교회 건물이다. 2월 24일경 서울에서 밀명을 가지고 대구에 내려온 이갑성이 이 건물 반 지하실에서 대구교계 지도자인 이만집 목사, 김태련 조사, 백남채 선생 등을 만나고 대구 3.1운동 의지를 모았다.
1908년 건립한 대구 3.1운동 당시의 제일교회 건물이다. 2월 24일경 서울에서 밀명을 가지고 대구에 내려온 이갑성이 이 건물 반 지하실에서 대구교계 지도자인 이만집 목사, 김태련 조사, 백남채 선생 등을 만나고 대구 3.1운동 의지를 모았다.
근대로의 여행 3.1 만세운동길
천황당 못자리에 서문시장 형성
오늘의 서문시장은 천황당 못을 메워 시장이 형성되었다. 앞에 보이는 주택은 1899년 미국 선교사가 세운 사택이며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동산병원 효시가 되는 채중원이다.
오늘의 서문시장은 천황당 못을 메워 시장이 형성되었다. 앞에 보이는 주택은 1899년 미국 선교사가 세운 사택이며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동산병원 효시가 되는 채중원이다.
대구 3.1운동
1919년 3월 8일 - 대구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신명여학교 제6회 졸업생
내가 겪은 3.1운동
하루는 상급생 언니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일제의 압제 밑에 있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우리도 이 운동에 나가서 동참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는 우리들의 마음에 뜨거운 열성이 불 붓기 시작하였다. 그 후부터는 기숙사 이방저방에 쫓아다니면서 태극기 만들기와 그날에 입고 나갈 의복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우리학교 학생들의 의복은 검정치마에 흰저고리가 교복같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치마에 옛날에 입던 끈이 달린 치마허리는 따내버리고 반드시 조끼허리를 만들어 치마에 달아 준비하라는 특별지시를 받았다. 이유는 그날에 나가서 만세를 부르면서 달리며 뛰어가는데 안전하기도 하려니와 특별히 일경들에게 체포당하면 어떤 악형과 모욕을 당할지 모르니 꼭 조기를 만들어 치마에 달아 입으라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태극기를 크게 만들어 의복 속 가슴에 매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여학생들의 치마가 조끼허리로 변하여 진 것이다. - 3.1운동 당시 신명여중 2학년에 재학중이던 김학진 할머니의 친필회고록 일부 발췌 / 김학진 할머니(대구신명여학교 제10회 졸업생)
- 자료제공 학교법인 신명학원
1919년 3월 8일 - 대구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신명여학교 제6회 졸업생
내가 겪은 3.1운동
하루는 상급생 언니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일제의 압제 밑에 있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우리도 이 운동에 나가서 동참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는 우리들의 마음에 뜨거운 열성이 불 붓기 시작하였다. 그 후부터는 기숙사 이방저방에 쫓아다니면서 태극기 만들기와 그날에 입고 나갈 의복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우리학교 학생들의 의복은 검정치마에 흰저고리가 교복같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치마에 옛날에 입던 끈이 달린 치마허리는 따내버리고 반드시 조끼허리를 만들어 치마에 달아 준비하라는 특별지시를 받았다. 이유는 그날에 나가서 만세를 부르면서 달리며 뛰어가는데 안전하기도 하려니와 특별히 일경들에게 체포당하면 어떤 악형과 모욕을 당할지 모르니 꼭 조기를 만들어 치마에 달아 입으라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태극기를 크게 만들어 의복 속 가슴에 매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여학생들의 치마가 조끼허리로 변하여 진 것이다. - 3.1운동 당시 신명여중 2학년에 재학중이던 김학진 할머니의 친필회고록 일부 발췌 / 김학진 할머니(대구신명여학교 제10회 졸업생)
- 자료제공 학교법인 신명학원
대구 3.1운동 재연
2003년 2월 28일 정오. 기미년 당시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계성고, 신명여고, 경북고(당시 대구고보), 제일교회, 남산교회, 서문교회가 중심이 되어 '대구 3.1 독립운동재연추진위원회'를 발촉해서 재연행사를 벌였다.
- 자료제공 동산의료원 의료선교박물관
2003년 2월 28일 정오. 기미년 당시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계성고, 신명여고, 경북고(당시 대구고보), 제일교회, 남산교회, 서문교회가 중심이 되어 '대구 3.1 독립운동재연추진위원회'를 발촉해서 재연행사를 벌였다.
- 자료제공 동산의료원 의료선교박물관
대구 중구 동산동 881-3 대구제일교회 옆 3.1운동계단을 찾았다.
계산성당과 대구전경
성당 앞 쪽 기와집은 안중근 의사가 강연했던 당시 교육기관 해성재이다. 2층 기와집(○표)은 당시 신부 사재관이며 성당 앞으로 흐르는 내천은 대구에서 유일한 빨래터로 많은 물이 흘러 달성공원 쪽으로 연결된다.
성당 앞 쪽 기와집은 안중근 의사가 강연했던 당시 교육기관 해성재이다. 2층 기와집(○표)은 당시 신부 사재관이며 성당 앞으로 흐르는 내천은 대구에서 유일한 빨래터로 많은 물이 흘러 달성공원 쪽으로 연결된다.
교남기독청년회
대구선교지부가 청년 선교를 위해 1914년에 지은 건물이다. 이 건물 아넹서 이만집, 정광순, 김태련, 백남채, 김영서, 권희윤, 최경학, 이재인 등의 교계 청년들이 모여 교남기독청년회를 조직하고 대구 3.1운동 시 전 회원이 참여하였다.
대구선교지부가 청년 선교를 위해 1914년에 지은 건물이다. 이 건물 아넹서 이만집, 정광순, 김태련, 백남채, 김영서, 권희윤, 최경학, 이재인 등의 교계 청년들이 모여 교남기독청년회를 조직하고 대구 3.1운동 시 전 회원이 참여하였다.
대구고보
대구고보는 교장이 일본인이며, 교사들 중에도 일본인이 만흔 관립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전교생 약 200여 명이 대구 3.1운동에 참가했으며, 징역 6월에서 1년의 선고를 받았다.
대구고보는 교장이 일본인이며, 교사들 중에도 일본인이 만흔 관립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전교생 약 200여 명이 대구 3.1운동에 참가했으며, 징역 6월에서 1년의 선고를 받았다.
현 계성학교에서 본 서문시장
서문시장이 신식 상가로 발전되어 가는 모습이다. 멀리 나무가 많은 곳은 동산 외국인 사택이며 시장에는 상인들과 물물교환하기 위해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서문시장이 신식 상가로 발전되어 가는 모습이다. 멀리 나무가 많은 곳은 동산 외국인 사택이며 시장에는 상인들과 물물교환하기 위해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백립을 쓴 상인(서문시장)
상인들은 순종황제 국장일 기간에 백립을 쓰고 시장을 보러 왔다. 순검들이 시장에서 상인들을 감시하고 정보를 듣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상인들은 순종황제 국장일 기간에 백립을 쓰고 시장을 보러 왔다. 순검들이 시장에서 상인들을 감시하고 정보를 듣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천황당 못자리에 서문시장 형성
오늘의 서문시장은 천황당 못을 메워 시장이 형성되었다. 앞에 보이는 주택은 1899년 미국 선교사가 세운 사택이며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동산병원 효시가 되는 채중원이다.
오늘의 서문시장은 천황당 못을 메워 시장이 형성되었다. 앞에 보이는 주택은 1899년 미국 선교사가 세운 사택이며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동산병원 효시가 되는 채중원이다.
신명학교
신명학교는 1919년 3월 8일 대구 3.1운동에 교사 및 전교생 40여 명이 참가했으며, 징역 6월에서 1년의 선고를 받았다.
신명학교는 1919년 3월 8일 대구 3.1운동에 교사 및 전교생 40여 명이 참가했으며, 징역 6월에서 1년의 선고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