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스관 지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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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27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계성 3.1운동 기념탑
1919년 3월 8일 토요일 오후 1시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 전원은 김영서 교감의 지휘로 큰장(현 서문시장)에서 일제히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교감 김영서와 교사 최경학, 권희원, 최상원등은 학생 동원을, 백남채는 거사 계획과 준비를 담당 거사일을 3월 8일로 결정하여 신명학교와 대구고보등에도 통보하였다. 만성교회(현 제일교회) 조사 김태련은 계성학교의 등사기를 자기집으로 가져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고 아담스관 지하실에서는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이 날 본교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운집한 1천여 명의 독립만세 행렬은 경정통(현 종로)를 지나 동성로까지 행진하였으나 일제 군경의 가혹한 탄압으로 무차별 검거 해산당했고 3월 10일 오후 4시 덕산정 시장(현 염매시장)에서 재 궐기하였으나 이 또한 강제해산 당하였다. 그 후 본교는 휴교 조치되었고 영남지방에서 체포되어 실형 선고를 받은 76명중 본교와 관련된 인사는 44명이나 되었다. 이 거룩한 정신을 기리고 그 뜻을 계성인들에게 길이 전하고자 여기에 계성 3.1운동 기념탑을 건립한다.
여기 박혔던 '돌'은 1908년 이 아담스관을 건축할 때 대구 성벽의 돌을 옮겨온 것인데 일찍이 계성, 신명을 바탕으로 설립된 계명대학교에서 1995년 성서캠퍼스 본관을 신축하면서 그 뜻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머리돌로 옮겨갔다.
1995년 9월 15일
아담스관 지하실로 내려가는 입구
[대구3.1운동의 요람] 아담스관 지하
● 대구3.1운동의 전날인 1919년 3월 7일 본교 교사인 김영서, 백남채 등은 학생 김삼도, 이승욱, 허성도, 김수길, 김재범, 이이석 등으로 하여금 본 지하실에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토록 하였다.
● 1919년 3월 8일 3.1운동당시 본교 교사와 전교생 46명이 궐기하여 대구지역 3.1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대구지역에서 3.1운동으로 형을 받은 사람이 76명인데, 이 중에서 본교 현직 교사 5명, 전직교사 3명, 재학생 35명, 본교 졸업생 1명 합계 44명이 계성인이었다.
● 그 결과로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와 가혹한 탄압을 받아 교명을 공산중학교로 개칭할 수 밖에 없는 비운을 맞았었다.
대구 중구 대신동 277 계성고등학교 내 아담스관.
계성3.1운동기념탑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