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 순국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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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294-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왕산 허위 선생 순국기념비
왕산 허위 선생 순국기념비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4.4.1~1908.9.27, '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선생은 경북 선산 출신의 의병장으로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금산과 성주에서 의병 수백명을 일으켜 관병과 교전하여 충북 진천까지 진군했으나 고종황제의 해산명령으로 귀향하였다.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함께 군대까지 해산당한 후 고종의 밀명을 받고 경기도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전국의 의병을 통합하여 13도 창의군을 편성, 동대문까지 진격하엿으나 결국 패퇴하였다.
이후 허위 의병장은 임진강 일대에서 연합의병부대를 지휘하면서 군율을 정하고 군표를 발행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군기를 제조하는 등 의병활동을 계속하다 19-08년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같은 해 9월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 올라 5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旺山 許蔿 先生 殉國紀念碑(왕산 허위 선생 순국기념비)
허위(1854~1908)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13도의병연합부대의 군사장으로 활동하였다. 1897년 거의하여 경북 김천과 충북 진천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1907년에 다시 의병을 일으켜 포천·양주·철원·연천 등지에서 일군을 격파하였으며, 경기도 양주에서 13도의병연합부대를 결성시 군사장에 임명되어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하기 위하여 서울성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였으나 일제의 사전공격으로 실패하였다. 1908년 임진강 유역에서 의병연합부대를 재정비하여 총대장에 취임하여 경기도를 돌면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1908년 5월 체포되어 그 해 9월 27일 교수대에 올라 51세의 일기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4.4.1~1908.9.27, '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선생은 경북 선산 출신의 의병장으로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금산과 성주에서 의병 수백명을 일으켜 관병과 교전하여 충북 진천까지 진군했으나 고종황제의 해산명령으로 귀향하였다.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함께 군대까지 해산당한 후 고종의 밀명을 받고 경기도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전국의 의병을 통합하여 13도 창의군을 편성, 동대문까지 진격하엿으나 결국 패퇴하였다.
이후 허위 의병장은 임진강 일대에서 연합의병부대를 지휘하면서 군율을 정하고 군표를 발행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군기를 제조하는 등 의병활동을 계속하다 19-08년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같은 해 9월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 올라 5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광무제 31년(1894) 왜병이 우리 주권을 무시하고 우리 국토에 올라 천인공노할 포학을 마구하여 왔으되 우리 정부는 황제나 국민의 의사에 어긋난 꼭두각시로 되었다. 국민은 끓어올랐다. 왕산 허위 선생은 떨쳐일어나 잃어진 주권을 돌릴려고 경상도 김산에서 의를 들어 괴뢰관군의 박격에 굽히지 않고 충청도 진천에 이르자 해산의 황명이 내렸다. 이때 적세는 일시 물러서고 적에 붙인 정부도 무너졌으매 그는 완전 복수설치를 못한 한을 머금은채 명에 좆아 돌아섰다. 그 뒤 황제는 선생의 재략을 듣고 불러올렸으나 그가 의정부참찬.비서원승 등 요직에 오를 그때는 이미 늦어 왜병이 또 들어와 러시아병을 쳐넘긴 광무8년(1904).9년의 사이라 선생은 그럼에도 마음을 떨어뜨리지 않고 안으로 국정을 바로잡고 밖으로 외모를 막아낼 길들을 갖추 아뢰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나라의 망함을 깨우치는 눈물의 상소와 왜병의 불법을 외치는 피끓는 격문으로 도리어 붙잡혀 갇히게 되었다. 나랏일의 이미 글렀음을 깨달은 그는 삼도봉 밑에 들어가

삼남의 지사들과 통하여 장래에 대비하였다. 그의 최후 결심은 이에서 더욱 굳어졌다. 과연 적은 병력으로 정부를 눌르고 역적들을 조종하여 우리 황제의 허락도 없이 조약을 맺았다고 주권을 완전박탈하였다. 선생을 일어나게 한 황제의 밀조가 내렸다. 눈물로 황명을 받아 깨어진 금구를 다시 맞추고 기울어진 대하를 다시 고울려고 경기로 나아가 거듭 깃발을 올리매 사방의 의사 모여들었다. 무기도 탄약도 식량도 없고 훈련도 안된 그들에게 적은 너무 억세었다. 선생은 각지의 의장들을 강원도 의장 이인영의 진지 원주에 모아 부서를 새로 간추려 이공을 총대장에 선생을 군사장에 그리고 8도의 대장을 내세워 기일을 정하여 서울로 들어가 적의 통감부를 뒤엎어 일거에 주권을 회복할 책략을 세워 각국 공관에 국제법상 교전단체임을 알리웠다. 그 어찌 뜻하였으랴. 각도 의장들은 기일에 닫지 못하고 이공은 친상을 만나 뒷일을 선생에게 부탁하고 가버려 약정한 그 날 선두에서 지휘하는 그의 친병만이 동대문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천문이랄가 반역자의 밀고와 적의 강습으로
아직도 굽힐줄을 모르고 재거를 도모하던 그의 몸마저 적에게 넘겨졌다. 적진에서의 늠름한 답변에 신문하던 적장도 도리어 그의 구명에 힘쓰도록 되었으며 최후의 그 순간 명복을 빈다는 왜송을 꾸짖어 물리치고 자신의 뒷일에도 불관하는 의기로 옥관을 꾸짖고 오직 「국권을 돌이키지 못하고 어버이 장례도 치루지 못하여 충도 효도 안되니 죽은들 어이 눈감으리」한 유서에 남긴 그 장렬함 국민의 울부짖음 「천일무광」이라 일렀으니 곧 광무 12년, 10월 21일이었다. 생각건대 선생은 초야의 선비로써 국가위급의 즈음 부름을 받았으니 그것이 좀더 일찍었더라면 또 비록 때늦어도 그 때 그 말씀이나마 시행되었더라면 그러나 이로서 그는 그저 일절 만의 선비 아니었음을 가히 알리라. 그리고 고래 우리 민족은 많은 침략에 대결한 민중 항쟁사를 가졌는데 그 때마다 관의병의 구별 없이 거족일치였고 혹 외국원조도 있었지마는 이 때의 우리 의병에게는 안팎으로 비부의자의 성원도 없었을뿐 아니라 도리어 매국노의 사역하는 우리 관군과도 싸우면서 조국에 바친

그 정충이며 또 지방적으로 산간벽지에서 활동하는 게릴라의 범주를 벗어나 중앙지역에서 적의 침략근거를 엎으려던 그 장거며 또 만반산사격인 의병을 조직화 체계화하며 그 힘을 뭉칠려던 그 웅도 가히 일월과 빛을 다툴지니 이 실로 역사의 광휘요 민족의 정화라. 적의 근 병력과 현대적 무기는 능히 한때 그 목숨을 앗았으나 길이 그 정신을 꺾지 못하였다. 선생의 순국 후 그 동지 문생 유족 후인들이 정신을 받아 의병운동에 잇는 광복군운동으로써 국내 국외에서 싸워오기 사천여년 드디어 오늘이 있게 되었다. 지금 갈라진 국토을 부합하여 민족 전체의 자유를 누리게 함도 이 정신에 있을 것이며 자손만대에 이 땅 이 겨레를 지키고 발전시킴도 이 정신에 있을 것이라. 광복 후 이 곳에 기념사업회가 생기고 금년 3.1절 국가에서 건국공로상 중장이 추증되고 개천절에 본도의 후원으로 이 곳에 돌을 세워 선생의 정신을 천양하노니 이 곳은 선생의 본 고장 영남의 중심이오. 이 돌에 새겨진 선생의 정신은 만세에 빛이 되리니 선생의 정신은 곧 민족의 정신이라 삼가 새기노니
여기 우리는 이 겨레를 위하여 그 목숨과 넋을 바친 거룩한 얼을 보았다. 이 얼은 우리의 아득한 옛 한아버지에서 이어받아 끝없는 뒷 자손에게 길이 내리리라.
서기 1962년 10월 3일

풍산 유석우 지음 고령 박병철 글씀
왕산 허위선생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