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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 산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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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북구 동변동 산 50 인천이씨 영사재 뒤 가람봉 산기슭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 선생 묘를 찾아가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義士 池吾 先生 仁川李公 之墓(의사 지오 선생 인천이공 지묘)
義士 池吾 先生 仁川李公 之墓(의사 지오 선생 인천이공 지묘)
대구 북변에 위치한 다전곡 아늑한 기슭에 한 무덤이 있으니 이는 곧 우국지사 지오 선생의 유택이다. 선생의 성은 이씨 휘는 경희 자는 군선 관은 인천이다. 고려 상서 좌복야 상주국 소성후 휘 허겸을 시조로 선조 임진년 왜란 때 팔공산의 창의를 주관 입공하고 무태리에 복거한 태암 선생 휘 주의 11세손이다. 고의 휘는 병두 비는 경주최씨이며 고종 17년 경진 6월 11일에 출생하사니 용의가 비범하고 자품이 영민하셨다. 일찌기 한성 기호중학을 졸업한 후 을사보호조약 이래 시정이 어려워짐에 따라 대구협동 등 제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2세 교육에 전념하셨다. 기울어지는 국권을 걷잡을 수 없었던 중 경술국치를 당하여 사직이 전복되자 비분강개함을 금치 못하셨다. 4243년 8월 중국 봉천성 장백현에 망명하여 당지에서 다시 달신학교와 중국어언학교를 설립하여
계속 2세 교육에 진력하시는 한편 4245년 동성 무송현에서 중국인 둔전 삼백일경을 조차하여 망명 본국 위관을 규합 둔전을 경영하여 군자를 조달하고 조선 청장년을 모집하여 군사 교련에 전력하신 바 이는 후일 광복군의 모체적 역할이 되었다. 4256년 3월 조국 광복에 집조한 선생은 직접 행동으로 혁명을 일으킬 결심 하에서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단 폭탄사건에 참여하여 단장 김원봉 장군을 비롯 김지섭 김시현 유시태 홍종우 황옥 남정각 유석현 이현준 조황 백영무 유병하 등 제 선생과 모의 획책한 결과 천신만고로 폭탄 권총 조선혁명선언서 및 조선총독부 관공리에 대한 투항 권고문 등 많은 물량을 만주로부터 국내 잡입에 성공하고 거사 일보직전 왜경에 탐지되어 경기도 경찰부에 동지 12인과 함께 피검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셨다. 이로부터 일제의 강압은 더욱 가혹하였다. 4260년 민족 단일당인 신간회 창립에 흔연찬동하여 중앙회 총본부 총무와 경상북도 지회장을 겸무하신 바 한때 도지회 산하에 30 세포와 만 여 회원을 포섭 활약하다 밀양에서 피검되어 일제말 발악적 민족 말살의 창씨개명에도 굴하지 않고 적극 반대하다가 고초을 감당한 것도 그 한 예라 하겠다.
4278년 해방과 더불어 본 도부지사를 거처 4279년 1월 초대 대구부윤에 취임하셨으나 군정 하 제약된 제 조건에 구속되어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년 6월에 퇴관하셨다. 조국의 완전 독립을 염원하여 동년 9월 대한독립 촉성회 경상북도 위원장에 피선 취임하였으나 이 또한 객관적 정세가 불리함으로 박력있는 후진에게 양보하고 4282년 7월 남선 경제신문사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 창달에 힘썼으으니 그 장지는 후인에게 귀감이 되리라. 4282년 12월 4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영원 불귀의 길을 떠났으며 배 달성서씨 배 한양조씨로서 재화 재태 재춘 재우 재오 등 5자를 두고 여서로는 이범영 정인택 제씨이며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국가 포상
의 예우를 받았다. 명하여 이르건데
4278년 해방과 더불어 본 도부지사를 거처 4279년 1월 초대 대구부윤에 취임하셨으나 군정 하 제약된 제 조건에 구속되어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년 6월에 퇴관하셨다. 조국의 완전 독립을 염원하여 동년 9월 대한독립 촉성회 경상북도 위원장에 피선 취임하였으나 이 또한 객관적 정세가 불리함으로 박력있는 후진에게 양보하고 4282년 7월 남선 경제신문사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 창달에 힘썼으으니 그 장지는 후인에게 귀감이 되리라. 4282년 12월 4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영원 불귀의 길을 떠났으며 배 달성서씨 배 한양조씨로서 재화 재태 재춘 재우 재오 등 5자를 두고 여서로는 이범영 정인택 제씨이며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국가 포상
의 예우를 받았다. 명하여 이르건데
일생의 심력을 조국 광복에 바치시고 우국 애족의 일념은 어떤 권귀도 미혹시키지 못하며 불의의 부귀는 부운 같이 여기고 정빈여세 조석의 환도 개의치 않으셨으니 이 고귀한 청절은 진실로 백천세 이 민족의 표본이 되리이다.
단기 4302년 월 일
문하생 우국지사 광주 노기용 근찬
단기 4302년 월 일
문하생 우국지사 광주 노기용 근찬
대구 북구 동변동 산 50 인천이씨 영사재 뒤 가람봉 산기슭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 선생 묘를 찾아가고 있다.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 선생 묘소(愛國志士 池吾 李慶熙 先生 墓所)
선생의 약력
- 본관은 인천(仁川). 1880년 대구 무태 출생.
- 1905 한성 기호중학교 졸업.
- 대구협성학교. 안동협동학교교사.
- 1910년 서간도(西間島) 망명.
- 신흥무관학교, 달신학교, 중국어학교 설립 참여.
- 의열단 활동으로 2년여 옥고.
- 신간회 발족(중앙본부 총무).
- 창씨개명 거부.
- 해방 후 초대 대구부윤(市長).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위원장
- 남선경제신문사(현 매일신문) 사장
- 1949년 별세.
- 건국훈장 애국장
선생의 약력
- 본관은 인천(仁川). 1880년 대구 무태 출생.
- 1905 한성 기호중학교 졸업.
- 대구협성학교. 안동협동학교교사.
- 1910년 서간도(西間島) 망명.
- 신흥무관학교, 달신학교, 중국어학교 설립 참여.
- 의열단 활동으로 2년여 옥고.
- 신간회 발족(중앙본부 총무).
- 창씨개명 거부.
- 해방 후 초대 대구부윤(市長).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위원장
- 남선경제신문사(현 매일신문) 사장
- 1949년 별세.
- 건국훈장 애국장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 선생 묘소(愛國志士 池吾 李慶熙 先生 墓所)
선생의 약력
- 본관은 인천(仁川). 1880년 대구 무태 출생.
- 1905 한성 기호중학교 졸업.
- 대구협성학교. 안동협동학교교사.
- 1910년 서간도(西間島) 망명.
- 신흥무관학교, 달신학교, 중국어학교 설립 참여.
- 의열단 활동으로 2년여 옥고.
- 신간회 발족(중앙본부 총무).
- 창씨개명 거부.
- 해방 후 초대 대구부윤(市長).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위원장
- 남선경제신문사(현 매일신문) 사장
- 1949년 별세.
- 건국훈장 애국장
선생의 약력
- 본관은 인천(仁川). 1880년 대구 무태 출생.
- 1905 한성 기호중학교 졸업.
- 대구협성학교. 안동협동학교교사.
- 1910년 서간도(西間島) 망명.
- 신흥무관학교, 달신학교, 중국어학교 설립 참여.
- 의열단 활동으로 2년여 옥고.
- 신간회 발족(중앙본부 총무).
- 창씨개명 거부.
- 해방 후 초대 대구부윤(市長).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위원장
- 남선경제신문사(현 매일신문) 사장
- 1949년 별세.
- 건국훈장 애국장
三省門(삼성문)
영사재(永思齋)
소재지 :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로 24길138-2(동변동 102-2번지)
인천이씨 이영환(李英煥) 호(號) 천하(川下)의 재실로 선생은 가정(家庭)의 교훈(敎訓)을 이어받아(承襲庭訓:승습정훈) 분수(分數)를 지켜 면학(勉學)하였다. (修分力學:수분역학) 1935년 후손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사로 토석으로 이은 담장을 둘러싼 삼성문을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소로수장형식의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은 건물이다.
사단법인 대구문화유산
소재지 :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로 24길138-2(동변동 102-2번지)
인천이씨 이영환(李英煥) 호(號) 천하(川下)의 재실로 선생은 가정(家庭)의 교훈(敎訓)을 이어받아(承襲庭訓:승습정훈) 분수(分數)를 지켜 면학(勉學)하였다. (修分力學:수분역학) 1935년 후손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사로 토석으로 이은 담장을 둘러싼 삼성문을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소로수장형식의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은 건물이다.
사단법인 대구문화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