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1317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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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대구를 다시 찾았다. 저번 탐방시 파악이 안돼서 탐방하지 못했던 두 곳을 찾아왔다.
첫번째로 대구 북구 검단동 1317에 있는 의사 소몽 채기중 순국기념비를 찾아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침하기 위해 군자금 모집 무기 구입 등을 적극 추진하다 정사 1917에 박상진과 같이 영남일대를 담당하여 첫재 부역불순자를 처단하고 그 대문 위에 일유광복은 천인시부하니 성차대죄하야 경아동포라 특서하시곤 했다. 무오 1918에 광복회사건을 왜경에 밀고한 자 있어 의사는 국내활동의 어려움을 깨닫고 상해로 망명을 결정하여 목포에서 대선 중 불행히 피체되시여 공주 및 서대문옥에서 수년간 혹독한 고액에도 불굴하시다가 신유 1921 7월 7일에 김경태 임세규 등과 같이 마침내 악형으로 순국하시니 아 거룩하시다. 의사는 초야한사로서 성취이둔은 교사하지 않으시고 오직 천경지의인 민족정기에 입각하여 혈맹고천하고 두사기족하여 먼저 창귀의 혼을 빼서 희적의 투지를 고취하고 풍찬노숙에 강?간피함에 적사가 집중되자 ?신해외하야 권토중래를 꾀하시다가 졸리화망하여 연옥설교에 매불절구하고 부시금혈에 계칙자질하시며 종용순신하시였도다. 을유 1945의 조국광복에 따라 국민훈장을 받으섰고 위해는 배위 고씨와 함께 동작동 선열묘지에 봉안하였다. 의사의 휘는 기중 자는 극오 호는 소몽 성은 채씨오 관은 인천이니 다의당빈재양 선생의 후예이시다. 의사의 족증손 인식 및 종손 석윤이 의사 질 명현 청을 받고 족내 현계씨의 힘을 얻어 압로정변에 비를 세우고 유고 및 위장시문을 인포하다. 의사의 정충고절을 무궁한 장래에 빛어주기 위해 목포금한시 2수를 색여둠 기시왈
木浦今日事(목포금일사) 痛哭仰看天(통곡앙간천) 擊欄還一笑(격난환일소) 白日復照然(백일복조연)
후략
木浦今日事(목포금일사) 痛哭仰看天(통곡앙간천) 擊欄還一笑(격난환일소) 白日復照然(백일복조연)
후략
설립자의 염원
○는 인간존재의 근본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미풍양속이였든 충효사상의 전통이 근대국적없는 민주주의 바람에 밀○ 시들어저가고 있다는 겄은 방가를 위해 가장 가슴앞은 일입니다. 특히 충애국심이 없으면 진실한 자유와 영○ 국권을 보전할수없읍니다. 이런 의미에서 충절의 귀감이라할수있는 소몽선생의 순국비를 이 금호강변에 세워서 우리 애국청소년들에게 선물로 드립니다.
채씨대종회 인천채씨종회회장 채현계 감역 채석윤 국가유공자협동사업장 합자회사 웅천석공 대표이사 김건한 근제
○는 인간존재의 근본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미풍양속이였든 충효사상의 전통이 근대국적없는 민주주의 바람에 밀○ 시들어저가고 있다는 겄은 방가를 위해 가장 가슴앞은 일입니다. 특히 충애국심이 없으면 진실한 자유와 영○ 국권을 보전할수없읍니다. 이런 의미에서 충절의 귀감이라할수있는 소몽선생의 순국비를 이 금호강변에 세워서 우리 애국청소년들에게 선물로 드립니다.
채씨대종회 인천채씨종회회장 채현계 감역 채석윤 국가유공자협동사업장 합자회사 웅천석공 대표이사 김건한 근제
대구 북구 검단동 1317에 있는 의사 소몽 채기중 순국기념비를 찾아왔다.
이러한 항일 구국활동 중 왜경에 체포되어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으며, 1945년 광복을 맞아 국민훈장을 받았고
유해는 동작동 선열묘지에 봉안하였다.
그 뜻을 기리기 위해 1976년 9월에 인천채씨 종중에서 검단토성 내에 건립하였다.
의사 소몽 채기중 순국 기념비(義士 素夢 蔡基中 先生 追慕碑)
유해는 동작동 선열묘지에 봉안하였다.
그 뜻을 기리기 위해 1976년 9월에 인천채씨 종중에서 검단토성 내에 건립하였다.
의사 소몽 채기중 순국 기념비(義士 素夢 蔡基中 先生 追慕碑)
義士 素夢 蔡基中 先生 追慕碑(의사 소몽 채기중 순국 기념비)
소몽 채기중 선생은 1873년 7월7일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에서 태어나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19세기말 민족적 위기와 저항을 체험하면서 고종 경술 1910년에 일본에게 국권이 상실되자 의사는 평소 사귀었던 동지
유순창, 유창열, 환훈, 안병수, 김병열, 정만교, 김상옥, 정운기, 정화진 등과 협의하여 소백산 아래 풍기에서
대한광복단을 조직하고 대구를 중심으로 광복활동에 분주하던 중 을유년(1915년)에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라 개칭하고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항일 구국활동 중 왜경에 체포되어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으며, 1945년 광복을 맞아 국민훈장을 받았고
유해는 동작동 선열묘지에 봉안하였다.
그 뜻을 기리기 위해 1976년 9월에 인천채씨 종중에서 검단토성 내에 건립하였다.
소몽 채기중 선생은 1873년 7월7일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에서 태어나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19세기말 민족적 위기와 저항을 체험하면서 고종 경술 1910년에 일본에게 국권이 상실되자 의사는 평소 사귀었던 동지
유순창, 유창열, 환훈, 안병수, 김병열, 정만교, 김상옥, 정운기, 정화진 등과 협의하여 소백산 아래 풍기에서
대한광복단을 조직하고 대구를 중심으로 광복활동에 분주하던 중 을유년(1915년)에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라 개칭하고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항일 구국활동 중 왜경에 체포되어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으며, 1945년 광복을 맞아 국민훈장을 받았고
유해는 동작동 선열묘지에 봉안하였다.
그 뜻을 기리기 위해 1976년 9월에 인천채씨 종중에서 검단토성 내에 건립하였다.
아 슬푸다. 아 국가민족의 반만년 역사가 도이의 침구로 조선조 고종경술 1910에 상실되여 왜적에 식민지로 강압되였으나 의사는 편호세역을 일절불응하고 충천한 의혈을 참지 못해 평소에 사귀였든 동지 유정창 유장렬 한훈수 김병렬 정만교 김상옥 정운기 정진화 등과 협의하여 소백산하 풍기에서 조국을 되찾기 위한 대한광복단을 조직하고 비밀결사로 대한의군부상덕태상회국권회복전등을 맺고 대구를 중심으로 광복활동에 분주하든 중 또 박상진 우재룡 양제안 권영만 김한종 엄정섭 등과 대동합류하여 을묘 1915에 대구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라 개칭하고 완전군대식으로 편성하여 기필코 왜적 섬멸 조국광복의 뜻을전지신명과 단군신전에 고유맹서하시였다. 해외망명지사와 상해임시요인들과 유대를 갖아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두어 독립군대를 양성하고 이를 뒤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