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234-33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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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당공원의 조양회관.
중국 만주 등에서 활동하다 대구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던 서상일은 대구의 독립운동가들의 뜻을 모아 달성공원 앞에 서양식 교육회관을 건립하게 된다. 조양회관 건축비는 대구구락부 회원들이 부담하기로 하고 부지는 서상일의 땅 500평으로 정하였다. 회관의 준공 후 당시 대구구락부, 대구여자청년회, 대구운동협회, 농촌봉사단체 등이 입주하여 민족계몽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하였다. 1983년에 효목동 망우공원 내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1987년부터는 광복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저번 원화여중고 탐방 시에 볼 수 없었던 동암 서상일 선생의 동상이 이 곳에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朝陽會館(조양회관)
東庵 徐相日 先生(동암 서상일 선생)
(1886-1962)
저번 원화여중고 탐방 시에 볼 수 없었던 동암 서상일 선생의 동상이 이 곳에 있었다.
(1886-1962)
저번 원화여중고 탐방 시에 볼 수 없었던 동암 서상일 선생의 동상이 이 곳에 있었다.
효목동 조양회관 | 등록문화재 제4호, 1922년 건립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중국, 만주 등지에서 항일민족운동을 펼친 서상일(1887~1962)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들이 민중과 청소년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건립한 회관이다. '아침 해가 비치는 곳'이라는 뜻으로 건물 이름을 조양회관이라 짓고, 대구 지역의 청년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을 펼쳤다. 정면 중앙의 돌출된 현관은 사각 돌기둥 4개를 세워 평지붕을 올린 형태이며, 기둥 사이는 반원형 아치를 틀어 장식하였다. 돌출된 현관 지붕에는 작은 삼각형 박공을 만들어 위엄 있게 구성하여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는 등 1920년대 근대건축 가운데 우수한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1984년 달성공원 앞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중국, 만주 등지에서 항일민족운동을 펼친 서상일(1887~1962)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들이 민중과 청소년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건립한 회관이다. '아침 해가 비치는 곳'이라는 뜻으로 건물 이름을 조양회관이라 짓고, 대구 지역의 청년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을 펼쳤다. 정면 중앙의 돌출된 현관은 사각 돌기둥 4개를 세워 평지붕을 올린 형태이며, 기둥 사이는 반원형 아치를 틀어 장식하였다. 돌출된 현관 지붕에는 작은 삼각형 박공을 만들어 위엄 있게 구성하여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는 등 1920년대 근대건축 가운데 우수한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1984년 달성공원 앞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東庵 徐相日 先生(동암 서상일 선생)
(1886-1962)
(1886-1962)
동암 서상일 선생은 우리 고장 대구가 낳은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이시다.
선생은 9인 결사대와 대동청년단 등 항일 단체를 결성하여 투쟁하셨으며, 조양회관을 건립하여 향토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셨다.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서 헌정의 초석 을 놓으셨고, 조국과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 아낌없는 정열을 바치셨다.
2004. 4. 18.
동암 서상일 선생 기념사업회장 권준호
선생은 9인 결사대와 대동청년단 등 항일 단체를 결성하여 투쟁하셨으며, 조양회관을 건립하여 향토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셨다.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서 헌정의 초석 을 놓으셨고, 조국과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 아낌없는 정열을 바치셨다.
2004. 4. 18.
동암 서상일 선생 기념사업회장 권준호
망우당공원의 조양회관.
중국 만주 등에서 활동하다 대구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던 서상일은 대구의 독립운동가들의 뜻을 모아 달성공원 앞에 서양식 교육회관을 건립하게 된다. 조양회관 건축비는 대구구락부 회원들이 부담하기로 하고 부지는 서상일의 땅 500평으로 정하였다. 회관의 준공 후 당시 대구구락부, 대구여자청년회, 대구운동협회, 농촌봉사단체 등이 입주하여 민족계몽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하였다. 1983년에 효목동 망우공원 내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1987년부터는 광복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 만주 등에서 활동하다 대구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던 서상일은 대구의 독립운동가들의 뜻을 모아 달성공원 앞에 서양식 교육회관을 건립하게 된다. 조양회관 건축비는 대구구락부 회원들이 부담하기로 하고 부지는 서상일의 땅 500평으로 정하였다. 회관의 준공 후 당시 대구구락부, 대구여자청년회, 대구운동협회, 농촌봉사단체 등이 입주하여 민족계몽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하였다. 1983년에 효목동 망우공원 내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1987년부터는 광복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조양회관(朝陽會館)
소재지: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1동 산 234의 33
이 건물은 본래 달성공원 앞에 세워졌으며 동암 서상일(東菴 徐相日) 선생이 앞장서 이 고장 애국인사들의 뜻을 모아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찾기위한 정신력을 기르는 도장으로 삼았다. 백두산(白頭山)의 목재를 써서 연건평 253평의 2층 건물을 1922년 10월 30일에 완공하였다.
이곳에서는 각종 애국적인 집회와 전시회가 열리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문화행사도 개최되어 청소년을 가르치고 민중을 일깨우는 등 영남 일대 민족운동의 중심이 되어왔다.
1940년부터 일본군에 징발되었다가 해방 후 원화여자중고등학교의 교사로 쓰였으며 1982년 대구시에서 인수하여 이곳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1987년 2월 28일부터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을 회원으로 하는 광복회(光復會)에서 사용하게 되어 이 건물의 역사적인 의의를 이어가게 되었다.
소재지: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1동 산 234의 33
이 건물은 본래 달성공원 앞에 세워졌으며 동암 서상일(東菴 徐相日) 선생이 앞장서 이 고장 애국인사들의 뜻을 모아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찾기위한 정신력을 기르는 도장으로 삼았다. 백두산(白頭山)의 목재를 써서 연건평 253평의 2층 건물을 1922년 10월 30일에 완공하였다.
이곳에서는 각종 애국적인 집회와 전시회가 열리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문화행사도 개최되어 청소년을 가르치고 민중을 일깨우는 등 영남 일대 민족운동의 중심이 되어왔다.
1940년부터 일본군에 징발되었다가 해방 후 원화여자중고등학교의 교사로 쓰였으며 1982년 대구시에서 인수하여 이곳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1987년 2월 28일부터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을 회원으로 하는 광복회(光復會)에서 사용하게 되어 이 건물의 역사적인 의의를 이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