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점학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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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김선기(金善基 原名 點學) 1906-1960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2008)
운동계열 : 국내외 항일, 대구 경북 중국
안장일시 : 2012년 5월 11일
묘역번호 : 52호
대구 교남학교 일본대학 수학. 동경 조선청년동맹활동, 대구청년연맹 조직, 신간회 대표 대구학생비밀결사로 1년형 옥고 중 장진홍 의사 옥중 순국 항의 파옥으로 8월형 추가. 창씨개명 거부, 학원 설립 계몽운동, 광복까지 수감.
여기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대한독립운동에 헌신하여 한 평생을 항일투쟁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는 한분이 잠들어 계시니 이 분이 바로 백헌 김선기(원명 점학)선생이시다. 관조는 려조에 공훈을 세워 김녕군에 봉해진 문열 김시흥공이며 김알지 대보왕의 35세손이며 호조판서 증 영의정 퇴휴당 순공은 관조의 7세손이다. 9세손인 이조판서 겸 삼군도진무인 배촌 김문기공은 사육신의 한분으로 병권을 쥐고 단종 복위를 도모 하던중 순절하였다. 정조께서 복관시켜 충의공 시호를 내렸다. 선생은 김녕김씨 충의공파 25세손인 정려효자 천석군 원모재
형규공과 의성김씨 유곡여사 사이에 1906년 10월 6일에 삼남 삼녀의 막내로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 간경리 766번지에서 태어나셨다. 풍모준수하고 총명과단하여 절의감이 강했다. 유년시절에 한학을 수학하였고 청도 김씨 성곤공의 장녀 명화여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정달 정희 진수(광열) 진애 진영 진옥을 두셨다. 선생은 1926년 4월 교남(대륜)학교 3학년 때 일본대학 정치과에 입학했다. 동경에서 조선청년동맹에 활동한 이유로 그해 7월에 퇴학당해서 귀국하였다. 1927년 6월, 대구청년연맹의 집행위원이 되었고 그해 12월 8일 신간회를 조양회관에서 개최하여 간사및 전국 대의원과 경북지부대표 12년엔 연합대표가 되었다. 1929년 7월에 선생은 동지를과 식민통치에 극렬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대구학생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되어서 경북경찰부 고등경찰에 검거되었다. 1930년 3월 11일에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1년형이 선고되어 옥고중 동년 9월초 조선은행폭탄사건의 장진홍의사 옥중순국과 박열 열사부인 옥사사건에서 함께 수감중인 진우연맹원들의 항의시위와 파옥에 선생도 적극 가담한 죄로 징역8개월을 추가 선고받고 그 익년 11월 13일에 출옥하셨다. 선생은 일제 강압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엄한 감시에도 학원을 설립하여 청소년과 여성들의 나라사랑 교육과 계몽운동에 열중하셨다. 1943년 5월경 일제와 투쟁하는 독립군조직운동이 탄로가 되어 유치장과 형무소에 구금되었다. 1945년 봄 옥고로 득병하여 병보석 되었으나 곧 재 수감되고 고문에 건강 악화로 보행을 못하여 사위 소기령에 업혀서 재판받던중 판결전에 8.15광복이 되었다. 선생은 고된 영어생활에 건강을 잃으셨으면 1950년 3월 5일
향년 55세로 영면하셨다. 논공 묘에서 동지들이 잠든 선열공원에 천장하였다. 정부는 2008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백헌 선생님을 존경하고 추모하면서 삼가 비명 한장지어 바친다.
나라와 겨레위해 헌신한 공적은 천추의 빛이되어 청사에 남아서 영세의 훌륭한 사표되셨네. 한평생 이룩한 일 정신적 지주되어 나라사랑하는 얼 길이 길이 빛나리
愛國志士 白軒 金善基 先生 之墓(애국지사 백헌 김선기 선생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