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낙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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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탐방로그
박낙현 묘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 5묘역에 있으며, 묘역번호는 43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성 지방을 주도하였다. 산하 교인들과 더불어 지역 사림과 모의 3월 12일의 의성장날 아침 일찍 읍내로 나가서 장터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장꾼들이 다 모인 정오에 시위 운동의 개최를 선언 후 차거는 우리 민족이 독립된 자주 민족임을 세계 만방에 호소하는 거족적인 행사라는 취지를 알린 끝에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사방에서 호응하는 만세소리 천지를 뒤흔들고 태극기의 물결이 하늘을 덮었다. 이윽고 일본 군경의 살기등등한 검거 선풍이 일어나자 주동자는 내라하고 잡혀가서 오늘 우리들의 거사는 정당한 권리 행사일 뿐 폭거는 아니다하고 맞서 징역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항상 행동의 제약을 받았으나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그들을 비판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다시 구금 당하였드니 광복 후에 출옥 비로소 목자의 외길로 돌아가서 1957년 4월 5일 70세로 타계하였다. 배 파평 윤씨는 춘옥의 녀다. 남은 성록과 태식이요. 녀는 김경식과 이성복이며 손은 영도 근도 길도 인도 정도이다. 1982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금추에 국비 보조로 묘비를 세우다.
1986년 12월 5일
오천 정희영 글을 짓고 성주 이준용 글씨를 쓰다
愛國志士 朴洛鉉 牧師 之墓(애국지사 박낙현 목사의 묘)
박낙현(朴洛鉉) 1887-1957 / 묘역번호 : 43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운동계열 : 3.1운동, 경북 의성
.안장일시 : 1957년 4월 10일
1919년 3월 18일 의성읍 장날에 독립만세운동 전개 결심. 대리동 교회의 목사로 의성공립보통학교 학생과 동지 규합. 태극기와 독립기 제작준비.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독립 만세시위 전개 중 체포. 1년 6월의 옥고를 치르다.
애국지사 박낙현 목사는 밀양 박씨로 행산공파의 후예이니 고는 수일이요, 비는 경산 김씨로 정수의 녀이다. 공은 1888년 8월 27일 의성군 금성면 대리에서 출생 일찍부터 신앙의 길을 쫓은 기독교 가정의 영향 아래 남 먼저 개화한 인사로 30 초년에 이미 대리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기미 3.1운동 때는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