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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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탐방로그
이봉로 묘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 4묘역에 있으며, 묘역번호는 40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1963년 3.1절에 국가에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선열묘지에 예장하여 비를 세우다.
1986년 1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오천 정희영 글을 짓고 달성 서석준 글씨를 쓰다
愛國志士 若松 李公 鳳魯 之墓(애국지사 약송 이봉로의 묘)
이봉로(李鳳魯) 1902-1940 / 묘역번호 : 40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운동계열 : 제2경북유림단, 대구 달성
.안장일시 : 1963년 6월 7일
1919년 파리장서를 가지고 심산 김창숙 선생과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에서 활동, 1924년 총기와 탄약 국내 반입과 군자금 모집 참여 중 북경에서 체포 대구로 호송, 1972년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애국지사 약송 이공의 휘는 봉로요 자는 이문으로 전의 이씨니 고려 태사 도는 상조요 가전충효 세수인경을 세종대왕이 상사한 가문으로 명선대의 현감 필이 부평에서 달성으로 옮겨 왔더니 인조대왕이 임어하야 霞鶩亭(하목정)이라 어서한 세족이다. 조는 하정공 현주로 경주군수하고 고는 궁내부 주사 근영이요. 비는 파평 윤씨로 참봉 석우의 녀다.
공은 1900년 7월 13일에 출생 중동중학을 나와 큰 뜻을 품고 북경으로 가서 서성공부에 유학하며 구국 항쟁의 길로 들어갔다.
유림단과 의열단에 적을 두고 판의단에 가담하여 혈맹으로 맺어진 동지들과 협의 대릉으로 쫓겨온 동포들을 모아 내몽고 황무지 수십만 평을 개간하여 그 수익금으로 군대를 길러서 대일 무력 항쟁을 다짐하고 그 소요 자금 20만원은 국내 부호들의 출연을 목표하여 김창숙 옹을 총책으로 송영우 김화식 동지들이 입국하고 공은 북경에서 국내외의 연락을 담당하여 상해로 가서 무기와 폭약 등을 구입 황보군관학교 무관들을 국내로 밀파하여 총독 이하 요인 암살과 주요 기관의 폭파 등을 조종하며 국내로 잠입했다가 피검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2년 여에 걸쳐서 수십회나 사경을 헤매었어도 추호도 굴함이 없이 버티다가 출옥했으나 끝내 육체가 견디지 못하여 1939년 1월 4일에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배는 파평 윤씨로 원규의 녀요. 자는 균 광 성 3형제이며 녀는 신동식 하재완 이길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