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 탐방로그
- 김충한 묘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 4묘역에 있으며, 묘역번호는 38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愛國志士 金忠漢 牧師 之墓(애국지사 김충한 목사의 묘)
김충한(金忠漢) 1883-1965 / 묘역번호 : 38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85년)
.운동계열 : 3.1운동, 경북 의성
.안장일시 : 1965년 12월 16일
1919년 3월 김천읍 3.1 독립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되어 동년 5월 대구지방법원에서 2년형으로 언도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85년)
.운동계열 : 3.1운동, 경북 의성
.안장일시 : 1965년 12월 16일
1919년 3월 김천읍 3.1 독립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되어 동년 5월 대구지방법원에서 2년형으로 언도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牧師 金公 諱 忠漢 之墓(목사 김충한의 묘)
애국지사 김충한 목사의 자는 서윤이요 호는 회사로 문소인이니 고려 유신인 의은공 성단은 중조요 병자호한의 순절사인 죽암공 찬은 9대조이다. 고는 의헌 극수요 비는 해주오씨로 만두의 녀다.
고은 1883년 10월 24일에 의성 팔지리에서 출생하니 천성은 인자하나 불의에 꺾이지 않는 강인한 기개가 있었다.
고은 1883년 10월 24일에 의성 팔지리에서 출생하니 천성은 인자하나 불의에 꺾이지 않는 강인한 기개가 있었다.
자유로 가학을 닦아서 세업을 이었더니 약년 25세에 미국 선교사 어두만 목사의 설교에 감화되어 엄한 유교 가문에서 개화로 전형하여 신앙의 길로 나아갔다. 봉양교회의 전도사를 거쳐 비봉리에서 개신학교를 세우는 등으로 복음전도와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다가 평양신학교를 나와 동산병원에 시무한 뒤 김천교회 목사로 옮긴 얼마만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김천지역을 주도하고 잡혀서 3년 징역 언도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자 더욱 일정을 비판하며 직언을 서슴치 않더니 1942년 신사참배 거부로 재수감되어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 비로소 목자의 외길로 돌아가서 영남 각처에 교회를 설립하고 대구 제1교회 목사를 거쳐 경북노회장을 역임하고 1965년 12월 14일 향수 83세로 영면하셨다.
초배는 안동김씨로 수극의 녀요. 계배 김순애 전도사는 김해인으로 석환의 녀이다. 자는 병철이요. 손은 인환 명환 능환이 있다.
출옥하자 더욱 일정을 비판하며 직언을 서슴치 않더니 1942년 신사참배 거부로 재수감되어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 비로소 목자의 외길로 돌아가서 영남 각처에 교회를 설립하고 대구 제1교회 목사를 거쳐 경북노회장을 역임하고 1965년 12월 14일 향수 83세로 영면하셨다.
초배는 안동김씨로 수극의 녀요. 계배 김순애 전도사는 김해인으로 석환의 녀이다. 자는 병철이요. 손은 인환 명환 능환이 있다.
1977년에 국가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고 선열묘역에 예장하여 이 비를 세우다.
1986년 11월 일
조천 정희영은 글을 짓고 달성 서석준는 글씨를 쓰다
1986년 11월 일
조천 정희영은 글을 짓고 달성 서석준는 글씨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