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 탐방로그
- 신재모 묘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 4묘역에 있으며, 묘역번호는 36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부인 부림 홍춘림 여사는 병흠 공의 따님으로 1892년 10월 21일 출생하여 1966년 5월 30일 세상을 마치시니 부덕이 있었고 묘는 북삼면 율동 유좌에 있으며,
자 성구, 자부 경주 최순금, 손 두일 상민, 손녀 혜경, 손서 상산 김철용이 있고,
녀 석구, 서 안동 권기환, 외손 권순국 순욱 순익 순직, 외손녀 순경, 외손서 밀양 박승범이 있다.
후학 대한민국 광복회 중앙고문 이강훈 삼가 짓고,
시생 영남대학교 문과대학교수 서경보 삼가 쓰다.
1986년 12월 15일
자 성구, 자부 경주 최순금, 손 두일 상민, 손녀 혜경, 손서 상산 김철용이 있고,
녀 석구, 서 안동 권기환, 외손 권순국 순욱 순익 순직, 외손녀 순경, 외손서 밀양 박승범이 있다.
후학 대한민국 광복회 중앙고문 이강훈 삼가 짓고,
시생 영남대학교 문과대학교수 서경보 삼가 쓰다.
1986년 12월 15일
凌海 申宰模 先生 之墓(능해 신재모 선생의 묘)
신재모(申宰模) 1885-1958 / 묘역번호 : 36
.훈격 :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운동계열 : 국내 항일, 경북 칠곡
.안장일시 : 1958년 6월 17일
1919년 35세때 대구에서 3.1 운동에 참가하고, 청년 동지(박열, 장진홍 등 100여명)와 규합하여 항일독립운동 비밀결사 진우연맹, 용진단, 파괴단 등 많은 독립단체를 조직하여 영도하면서, 일황과 일제 고급관리 암살계획이 발각되어 법정투쟁 2년 5년을 치름.
.훈격 :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운동계열 : 국내 항일, 경북 칠곡
.안장일시 : 1958년 6월 17일
1919년 35세때 대구에서 3.1 운동에 참가하고, 청년 동지(박열, 장진홍 등 100여명)와 규합하여 항일독립운동 비밀결사 진우연맹, 용진단, 파괴단 등 많은 독립단체를 조직하여 영도하면서, 일황과 일제 고급관리 암살계획이 발각되어 법정투쟁 2년 5년을 치름.
여기 이나라 선각자요 사상가요 혁명가로서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자유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바치신 민족의 지도자 한분이 잠들어 계시니 이분이 바로 능해 신재모선생이시다. 고령신씨 시조공 고려검교기감 성용의 19세손이신 한학자 영록공과 인동장연봉여사의 장남으로 1885년 4월 26일 경북 칠곡군 북삼면 율동세서 출생하셨는데 풍모가 준수하고 총명과단하며 정의감이 강하고 지력이 출중하시었다. 동년에 이미 경사자집과 시문에 능통하시더니 서울로 올라가 영어 국제어 사회과학등 신헉뮨연구에 열중하시다가 1905년 매국5조약이 늑성되고 그후 5년 통한의 경술국치를 당하여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하시면서 독립정신과 민족국가관을 정립하고 체계화하여 게몽지 '농촌'울 발간하시고 지식청년들을 규합하여 영남일대에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을 펴서 민족자각을 통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시었다. 대주청년회 대구농민회 정오회 등 항일단체를 조직지도 하면서 기미독립운동을 서울과 대구에서 주동하시었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셨는데 이떄 박열 장진홍 이상화 등 많은 지식청년들이 선생의 독립이념과 자유연합사상에 감화되어 구국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대구고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한 혁진단을 조직하여 항일학생운동을 지도하셨고, 대구노동공제회 대구노동친목회 용진단 철성단을 조직지도하는 한편 2천여 회원의 상호부조와 복리증진을 도모하시면서 왜적군수품의 대륙수송을 저지하고 자금인상투쟁을 성취시킨 철도운수의 총파업을 지휘하여 경부선을 7일간 마비시켰으며, 대구노동학원을 사재로 설립하여 회원자녀들을 교육하시었다. 1925년 전항일단체를 통활하는 진우연맹을 조직영도하시면서 전국독립운동자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셨고 적도 동경에 있던 박열의 흑우회를 재건케 하시는 한편 파괴단을 조직하여 적의 요인암살과 전관서의 폭파를 계획했다가 거사직전에 탐지되어 서동성 방한상 서학이 하종진 김동석 등 120여명의 청년동지들과 함께 피검되셨는데 선생은 방약무인한 법정투쟁을 2년동안이나 주도하시었고 단신 파옥 시위등 옥중투쟁을 7년간이나 지위하시었다. 출옥후 1934년 만주길림지방에서 자치농장을 세워 실향민 100여호를 수용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셨다. 그후 임시정부로 망명도중 피체되어 2년간 감금되셨고 거듭된 예비검속으로 10여년의 옥고를 겪으셨다. 광복후 동지들과 함꼐 조국통일에 전념하시면서 건국에 참여할 청년동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시었고 선생의 후광과 지원을 받은 최해청과 청년동지들이 독립정신을 창학이념으로 한 청구대학을 세웠으며 임시정부 국무위원 유림은 독립노농당을 창당하고 중앙감찰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1958년 6월 15일 향년 74세로 대구시중구 삼덕동에서 영면하시니 동지들은 이곳 선열묘지에 성대한 사회장으로 모시었고, 대한민국정부건국포장으로 서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