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 탐방로그
- 박재헌 묘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 4묘역에 있으며, 묘역번호는 31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2월 28일에 향수 87세로 별세하였다.
배 이자근년 권사는 합천이씨로 기모의 여이며 자는 영열 형열이요. 여에 진열은 정수동과 은열은 조재규와 혼인하였다.
국가는 공을 예우하여 선열묘지에 봉장하고 이 비를 세우다.
1986년 11월 15일 오천 정희영 글을 짓고 달성 서석준 글씨를 쓰다
배 이자근년 권사는 합천이씨로 기모의 여이며 자는 영열 형열이요. 여에 진열은 정수동과 은열은 조재규와 혼인하였다.
국가는 공을 예우하여 선열묘지에 봉장하고 이 비를 세우다.
1986년 11월 15일 오천 정희영 글을 짓고 달성 서석준 글씨를 쓰다
愛國志士 原堂 朴在憲 長老 之墓(애국지사 원당 박재헌 장로의 묘)
박재헌(朴在憲) 1900-1986 / 묘역번호 : 31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운동계열 : 3.1운동, 대구 달성
.안장일시 : 1986년 3월 3일
1919년 3.1운동에 계성학교 학생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 참가로 체포.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르다. 1922년 독립공채모집 및 자유지 간행 등으로 부친 박기형과 함께 활동, 외국인 선교사와 미국 의원단에게 독립을 호소함.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운동계열 : 3.1운동, 대구 달성
.안장일시 : 1986년 3월 3일
1919년 3.1운동에 계성학교 학생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 참가로 체포.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르다. 1922년 독립공채모집 및 자유지 간행 등으로 부친 박기형과 함께 활동, 외국인 선교사와 미국 의원단에게 독립을 호소함.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고 저 성전돌 같이 긴하게 하소서. 주 구원하신 능력을 주 구원하신 능력을 늘 끝날까지 주소서.
- 찬송가 50장 3절
- 찬송가 50장 3절
애국지사 박재헌 장로의 호는 원당이요 밀성인이니 행산공파로 정조때 밀양에서 달성으로 옮겨 온 유학자 초산공 세수의 5대손이다. 고는 처사 기수요. 비는 충주 석씨 옥룡 여로 1900년 1월 25일 화원 유곡에서 출생 흥화사립학교를 나와 한문을 읽다가 국권을 앗아 간 일정의 강압이 날로 더해가자 끓어 오르는 적개심을 억누르며 장구한 구국 운동에는 신문화가 절실함을 깨닫고 17세의 봄 경성학교에 진학 열심히 은사를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하는 학우들과 훗날의 큰 일을 위하여 손을 잡고 3.1의거의 날을 맞았다. 여러 낮밤 공작 끝에 3월 8일 대구장날을 기하여 서문시장에 모여 쌈섬 위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운집한 부민들과 더불어 시위행진에 들어 가서 만세소리 천지를 뒤흔들며 일본 관헌과 맞서 종로는 피 바다를 이루었다. 2차 시위는 3월 10일 덕산새장으로 약정 엿장수로 변장하여 전단을 운반 사방에서 일제히 만세소리 일어나자 일헌은 80병대까지 동원 총검으로 포위망을 좁혀 오니 공은 주동자는 내라 하고 잡혀 모진 고문 끝에 연소자로 감형되어 징역 6개월을 치렀다. 출옥하자 대릉과 연락망을 두고 평양 숭실대학에 재학 중 평남도청 폭파 혐의로 잡혔다가 풀려 나자 재헌으로 개명하고 밀양으로 잠입하여 집성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고인덕 동지와 접촉 중에 다시 일경의 추적을 받고 대구로 와서 미국선교사를 의지하며 임정 소식을 자유지에 실어서 군자금을 모집 이정호 동지를 상해로 밀파하는 등으로 활약하던 중 세계대전의 발발로 예비 검속 당하여 광복의 날까지 옥중에서 고초를 겪었다. 1968년에 독립 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고 198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