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길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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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탐방로그
신길우 묘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 1묘역에 있으며, 묘역번호는 2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신길우(申吉雨) 1916~1979 / 묘역번호 : 2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운동계열 : 광복군, 경북 고령
.안장일시 : 2003년 12월 7일
1943년 일군에 강제징집 중국 남경지구 일본군에서 탈출. 광복군에 입대.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서 임정요인 경호 및 기관요원 양성과 교민의 생명 재산 보호 임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여기 조국의 주권 회복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굳은 신념으로 전쟁터에서 생명을 걸고 일본군대를 용감하게 탈출하여 항일 구국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광복군에 입대하였고 조국 광복을 위하여 활약하신 분이 이곳에 잠들어 계시니 이 분이 바로 애국지사 운남 신선생이시다. 지사님은 고려 신씨 시조 고려 문과 검교 군기감 성용공의 23세인 신휴공과 성주 이무야 여사 사이에 4남 중 장남으로 1924년 4월 2일 11일 고령군 고령읍 운수면 운산동 354번지에서 태어나셨는데 풍모가 준수하고 품성이 착하며 정의감이 강하셨다. 향리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주경야독하면서 가업 도우며, 효도하는 모범 청년이었다. 일제는 피땀 흘려 지은 농사를 공출 명목으로 양곡을 수탈하고, 부당한 강제 노력 동원에 항일 사상이 가슴을 매웠다. 징병 1기로 1944년 9월에 강제 징집 당하여 중국 남경 지구에 주둔한 일본군 부
대로 배속되어 보병대대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눈물 겨운 군인생활을 하셨는데 중국 중경에 한국 독립을 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활동한다는 정보로 독립군이 되겠다는 결심이 굳어졌고 조국 독립을 위하여 규합한 동지 7명이 함께 탈출을 기도했으나 몇 번 실패하고, 1944년 12월경 중국 호남성으로 병력 대이동에 야간 행군을 틈타서 동기 배선두 오연근 신인식 지사와 함께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삼엄한 경계를 피하여 일본군 대열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중국군 부대를 전전하며 대일 전투에 참가하였다. 호남성 상담에서 중경까지 수천리 먼 대륙길을 적과 싸우면서 구사일생으로 가는데 중국군과 미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임시정부에 와서 감격하며 우셨다. 우선 토교대에 입대하여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로 배속되어 근무하면서 김구 선생이 영도하는 한국독립당 비밀당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의 경호를 맡았으며, 교민의 생명 재산보호 및 기간 요원 양성을 위한 일과, 특히 장기간의 고된 군사 훈련을 받고 폭격기로 한국 내의 일본 군사시설을 폭파할 실행이 임박하였는데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항복으로 이 실전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 익년 1946년 7월까지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이범석 장군이 인솔하는 귀국준비를 도우며, 비행기 편괴 배편으로 함께 귀국하셨다. 광복 후 혼란기와 분단된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시면서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시다가 1954년 대구로 이주하셨고, 항상 조국의 장래와 통일을 염원하면서 안빈낙도 하셨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고 생존지사로서 금오대상도 수여되었다. 지사님은 평소 건강하셨으나 갑작스런 충격으로 2003년 12월 5일 향년 80세로 대구시 서구 비산6동 자택에서 영면하시니 광복회에서는 동지장으로 대구 선열공원에 모셨다. 부인 김해 김소두 여사는 부덕이 있으며 슬하에 영자 영애 영숙 3녀를 두셨고 장녀는 안동 권삼진에게 차녀는 밀양 손선근에게 3녀는 밀양 박봉래에게 출가하였고 외손에 손정우 박창현 박철현이 있고 동생은 전우 후우 춘우이다. 지사님의 공훈을 기리고 추모하는 묘비 세우면서 삼가 비명 한 장 지어서 여기에 새긴다.
원수들과 함께 배운 전술을 내 나라 살리기 위하여 삼엄한 경비망을 목숨 걸어 일군부대 탈출을 하여서 대륙의 먼길 싸우며 달려가서 독립군 되어 활약하셨네. 나라와 겨레 위한 님의 발자취 길이 청사에 빛이 되리라.
2004년 4월 7일 광복회원 신성구 삼가 지어 쓰고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삼가 세우다.
愛國志士 雲南 申吉雨公 之墓(애국지사 운남 신길우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