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훈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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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탐방로그
김교훈 묘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 3묘역에 있으며, 묘역번호는 17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부인 광산 김필령 여사는 1902년 12월 25일 출생하여 1956년 2월 28일 별세하시고 묘는 고향 용문산 교회 묘소에 있다. 자에 형규 창의 충의 수의 상연 범조가 있고 손자에 사홍 사균 사국 대규 태근 성규 유진 민규가 있고 손녀에 혜정 정현
서기 1986년 12월 15일 후학 문학박사 김원중 글을 짓고 성주 후인 이봉호 삼가쓰다
義士 翠軒 金敎勳 先生之墓(의사 취헌 김교훈 선생의 묘)
김교훈(金敎勳) 1896-1973 / 묘역번호 : 17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운동계열 : 군자금 모집, 경북 김천
.안장일시 : 1973년 6월 2일
계성중학교 대구 3.8 만세운동 선도, 구미만세운동 주도, 농촌계몽운동, 군자금 모집, 만주 고산좌군관학교 장성 모집 인솔, 김천 예수교 교사로 재직 중 일경에 피체, 대구형무소에서 징역 1년 옥고를 치렀다. 서숙개설로 청소년 민족전통 교육에 치중함.
愛國志士 金公 敎勳 之墓(애국지사 김교훈 선생의 묘)
자 형달 수의 창의 상연 충의 범조
천주 음생 1973년 5월 31일 18시 별세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종교육을 위하여 불원가사하고 한평생을 구국독립운동에 몸바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시고 후세에 이를 길이 빛낸 애국지사 한분이 여기 잠들어 계시니 이분이 바로 취헌 김교훈 선생이시다. 김녕김씨 충의공 사육신 백촌 문기의 15손인 한학자 치주공과 안동 권송림 여사의 장남으로 1894년 12월 26일 김천군 아포면 인동에서 출생하셨다. 천품이 총명강직하고 정의감이 강했으며 유년시절에 이미 경학과 시문에 달통하였고 대구계성학교에서 독실한 기독교의 신앙을 가지고 학업에 열중하셨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시고 최재화동지 등과 함께 동기를 규합하여 경북지방
에 있는 적 관서에 경고문을 발송하고 독립선언문과 관계신문 등을 전 민가에 배포하시어 동 3월 26일 구미에서 또 한차례 격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시었다. 그후 왜경에게 쫓기면서도 군자금을 모아서 만주로 망명하시어 고산좌에 활동기반을 세우시고 군관학교에 자금지원을 하시는 등 조국광복을 위해 전력을 경주하셨다. 선생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투쟁목표를 세우시고 또 인재를 기루기 위해 다시 귀국하시어 고향 김천에서 사재를 넣어 양석학교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에 힘쓰시던 중 왜경에세 피체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르시었다. 그 후에도 초지일관 자주독립을 쟁취할 결의가 더욱 굳어졌으며 기독교우를 동지로 많이 규합하시고 삼남일대의 의병대장인 족친 김도현 휘하의 많은 의사들과 함께 국민회를 조직하셨는데 경기 이인훈 논산 조종국 고창 문진창 익산 이기환 부여 오학수 장성 황희연 함평 윤상겸 김제 김동규 성주 여지연 김천 김동기 등과 함께 조달한 군자금을 모아서 선생은 극비리에 중국 상해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에 전달하여 주석의 격려와 신임을 받고 돌아와 국내에서 투쟁활동을 전개하시다가 다시 피검되고 고문과 옥고를 거듭 당하면서 광복을 맞이하셨다. 선생은 건국의 초석이 될 청년들에게 한국의 얼을 심어주기 위하여 김천에 대둔서림 선산에 죽림서림 상주에서 갑장서림 등을 세워서 청년교육에 정성을 다하시었다. 그리고 백범 선생이 시해당한 비보에 충격받아 두문불출하시고 선비의 곧은 정신 지키시며 1973년 3월 5일 11일 향년 80세로 별세하시니 동지들은 이곳 선열 묘지에 안장하고 1982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대통령표창으로 추서하고 비를 세우다. 위대하고 거룩하신 선생의 애국충정 하늘의 태양처럼 천추에 빛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