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서룡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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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탐방로그
송서룡 묘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 1묘역에 있으며, 묘역번호는 1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국가는 공을 예우하여 선열묘역에 안장하고 이 비를 세워 길이 천추에 전하다.
1986년 11월 15일 오천 정희영은 글을 짓고 달성 서양준은 글씨를 쓰다
愛國志士 瑞山 宋公 瑞龍 之墓(애국지사 서산 송서룡의 묘)
송서룡(宋瑞龍) 1916~1979 / 묘역번호 : 1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운동계열 : 광복군, 평북 운산
.안장일시 : 1979년 9월 11일
광복군 제3지대에서 정보수집 활동. 중국군 첩보대와 함께 일본군 활동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군과 광복군에 전달. 항일독립전쟁에 기여함.
애국지사 송서룡 공은 항일 전선의 첨단을 누비며 싸운 광복군의 일원이다. 서산 송씨로 상조는 문익이요 중조는 이석으로 평안도 지방의 성족이다. 부는 태환이요 모든 이숙영으로 1916년 3월 8일 평북 운산군 북진면 진동에서 출생 15세에 북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중학교에 재학중 노골적인 차별 대우를 받고 1932년 하기 방학으로 귀국하자 독서회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을 맹렬히 성토한 끝에 잡혀 20여일이나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서 더욱 배일의 사상은 굳어졌다.1935년 4월에는 완농광업소에 취직하여 민족 운동의 서클을 조직했다가 다시 잡혀 많은 고초를 당한 후 대륙으로 건너가서 구국의 항쟁의 길로 들어갔다.소간찬 동지와 죽음의 맹세를 손을잡고 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하남성 이북현 하읍현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1942년 봄 광복군 제6변사 분처에 입단 소정의 훈련과정을 수료한 뒤 추양현으로 파견되어 지하 공작원으로 눈부신 성과를 올리고 귀덕성 지역으로 이동하여 특파단 제16대대 3중대 소속으로 임천과 주가구 등지에서 항쟁중에 광복을 맞았다.
1946년 5월 12일에 고향 북진으로 귀국했다가 1948년 봄에 월남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받고 달성군 성서에서 낙농업을 경영하며 역경의 동지들과 같이 살다가 1979년 9월 9일 행년 64세로 졸하였다.
배 선우실탄은 태원인이요 자는 영기이며 녀는 영순으로 김구만과 혼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