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산9
- 탐방로그
- 이상정, 이상화, 이상백 삼형제의 묘가 같은 공간에 있으며, 삼형제의 큰아버지인 이일우의 송덕비도 묘소로 가는 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墓地 畧歷(묘지 약력)
이상백, 이상정, 이상화의 큰아버지인 이일우의 송덕비(李一雨 頌德碑)이며, 묘소로 가는 길에 있다.
詩人 白亞(시인 백아)
月城李公 諱 相和 之墓(월성이공 휘 상화 지묘)
孺人 達城徐氏 베로니카 之墓(유인 달성서씨 베로니카 지묘)
서기 1902년 9월 4일 생, 서기 1984년 1월 5일 졸
月城李公 諱 相和 之墓(월성이공 휘 상화 지묘)
孺人 達城徐氏 베로니카 之墓(유인 달성서씨 베로니카 지묘)
서기 1902년 9월 4일 생, 서기 1984년 1월 5일 졸
月城李公 相和 之墓(월성이공 상화 지묘)
民族詩人 李公 相和 之墓(민족시인 이공 상화 지묘)
천년의 비바람소리 만학(萬壑)을 굽이쳐 여기 흘러라. 우리 고장 대구가 낳은 민족시인 이상화(李相和) 선생은 비록 43세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온몸으로 불태운 그 빛나는 애국얼과 높은 시혼(詩魂)은 이 겨레의 영원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1922년 《백조(白潮)》를 통해 시단에 나온 이상화 시인이 일제의 억압이 절정에 달해 있던 1926년 피로서 쓴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민족정신사를 밝혀주는 커다란 횃불로 길이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1943년 시인이 작고하자 향우(鄕友)들이 애달픈 마음 달랠 길 없어 묘전에 비 하나를 세웠으나 오랜 세월의 풍상 속에서 비신(碑身)이 심하게 훼손된 지라 이번 다시 유족과 고인을 기리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이 빗돌을 세운다. 2003년 5월 22일 竹筍文學會(죽순문학회)
1901년 5월 22일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2가 11번지에서 부친 이시우(李時雨), 모친 김신자(金愼子) 여사의 차남으로 출생, 그 형제들을 두고 세인들은 용(상정 독립운동 중국국부군 중장), 봉(상화 민족시인), 인(상백 분학박사 IOC위원), 학(상오 사격협회회장 수렵가)이라 일컫고 있으며 호는 상화(尙火), 백아(白亞), 무량(無量)으로 썼다.
1918년 경성중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3.1운동 대구거사에 허범(許範) 등 동지들과 참여했고,
1922년 《백조》 동인이 된 후로는 잇따라 주옥 같은 시편을 내놓아 일약 시단의 총아가 되었다.
1923년 도일하여 외국어전문교인 〈아테네 프랑세〉에 수학하면서 프랑스 유학의 꿈을 키웠으나 관동대지진으로 귀국, 서울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며 시작에 전념.
1926년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데 이어
1928년 독립자금 마련을 위한 소위 「ㄱ당사건」에 직접 참여 활동하였다. 이 시기 서문로 자택을 담교장(淡交莊)이라 하여 배일 인사들에게 개방하였으며,
1930년 에는 애향(愛鄕)의 정이 절절한 「대구행진곡」을 작사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1936년 중국으로 망명한 백씨 이상정(李相定) 장군을 찾아간 일로 귀국과 함께 또 한차례 수난을 겪었고, 구금이 풀리자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민족사상 고취에 힘썼으나 오랜 심화로 얻은 병세악화로
1943년 4월 25일 계산동(桂山洞) 자택에서 부인과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하시니 향년 43세였다.
1990년 정부에서는 선생에게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18년 경성중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3.1운동 대구거사에 허범(許範) 등 동지들과 참여했고,
1922년 《백조》 동인이 된 후로는 잇따라 주옥 같은 시편을 내놓아 일약 시단의 총아가 되었다.
1923년 도일하여 외국어전문교인 〈아테네 프랑세〉에 수학하면서 프랑스 유학의 꿈을 키웠으나 관동대지진으로 귀국, 서울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며 시작에 전념.
1926년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데 이어
1928년 독립자금 마련을 위한 소위 「ㄱ당사건」에 직접 참여 활동하였다. 이 시기 서문로 자택을 담교장(淡交莊)이라 하여 배일 인사들에게 개방하였으며,
1930년 에는 애향(愛鄕)의 정이 절절한 「대구행진곡」을 작사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1936년 중국으로 망명한 백씨 이상정(李相定) 장군을 찾아간 일로 귀국과 함께 또 한차례 수난을 겪었고, 구금이 풀리자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민족사상 고취에 힘썼으나 오랜 심화로 얻은 병세악화로
1943년 4월 25일 계산동(桂山洞) 자택에서 부인과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하시니 향년 43세였다.
1990년 정부에서는 선생에게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李庄家(이장가)
南齋(남재)
祭閣(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