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281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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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익호와 아들 이준석의 묘소는 한 공간에 앞뒤로 있으며, 부친 이익호의 묘소가 뒤쪽, 아들 이준석의 묘소는 앞쪽에 있다.
포항 송라면 대전리에 있는 3.1의거기념관 바로 옆에 이익호 선생과 이준석, 이준업 형제의 생가가 복원되어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앞쪽에 있는 義士 永川李公 俊石 之墓(의사 영천이공 준석 지묘)
義士 永川李公 俊石 之墓(의사 영천이공 준석 지묘)
義士 永川李公 俊石 之墓(의사 영천이공 준석 지묘)
공의 성은 이 휘는 준석 자는 태원 호는 송대 관은 영천이다. 공은 서기 1896년 5월 7일 경북 영일군 송라면 대전리에서 익호공의 장자로 태어나니 천품이 온화하고 도량이 넓으며 기억력이 뛰어나 일찍 한학을 닦았다. 애국심이 남달라 항상 국운의 쇄퇴해감을 개탄하고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였으니 일찍 국취로 사옥의 날을 보낼 즈음 민충정공의 결단이 있자 상사를 잃고 부심하는 부군을 염려하여 유충의 몸으로 도보상경하여 아버님을 모시고 위로하며 귀향하였은즉 그 대담성과 충효지심은 향리가 다 아는 바였다.
공은 왜의 학정에 항가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부군을 도와 고향에서 대전리 유계리 적사리 교회등을 창립하는 한편 광흥사립학교를 세워 항일사상을 배양하고 있을 무렵 1919년 온민족의 분노가 폭발하여 3.1독립항쟁이 전국 각처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매 공은 기다렸다는듯 향내의 윤영복등 23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독립투쟁을 벌이기로
공은 왜의 학정에 항가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부군을 도와 고향에서 대전리 유계리 적사리 교회등을 창립하는 한편 광흥사립학교를 세워 항일사상을 배양하고 있을 무렵 1919년 온민족의 분노가 폭발하여 3.1독립항쟁이 전국 각처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매 공은 기다렸다는듯 향내의 윤영복등 23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독립투쟁을 벌이기로
밀약하였다. 공은 먼저 사재를 내어 거사에 필요한 출자를 하는 한편 대전리 본집에서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각 마을에 돌리고 약속된 3월 22일 청하장날 오후 1시를 기해 장터에 모연든 수백군중과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대기를 들고 선두에서 독립시위를 이끌고 나가매 시위군중은 더욱 늘어났고 항쟁의 함성은 그칠줄 몰랐다. 이날의 독립항쟁은 포항경찰서와 흥해헌병분견대등 일제관헌의 무력저지로 시위군중이 패산되고 공은 여러 동지와 함께 왜경에 의해 붙잡혀갔다. 온갖고문과 유혹이 있었으나 끝내 의연한 자세로 일관하다가 드디어 대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위반이란 명목으로 1년의 징역을 언도받고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어 갖은 옥고를 치렀다. 만기출옥한 공은 고향마을에서 대전리를 비롯한 일곱곳의 교회를 배경삼아 청년회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으며 항일운동을 계속해나갔다.
1923년 공은 일제의 감시와 압박이 날로 극심해지자 더 이상 고향에 머물러 활동할수없음을 깨닫고 왜경의 눈을 피해 벽촌인 경북 달성군 가창면으로 들어가 여러 골짝을 전전하면서 이발행상과 엿장수를 가장하여 주민들에게 암암리에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는데 이것이 왜경에게 발각되매 부득이 가창면 냉천동에 이주정착하여 은거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던중 만주땅으로 망명하여 항왜하던 친동생 준업이 일제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비보에 접하고 또 연이어 조카 희모가 부모의 원수를 갚고자 광복군에서 활약하다가 18세의 어린나이로 전사했다는 소식을 받은 공이 몸둘 한치의 땅도 없었다. 냉천골에서 심신을 이끌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이윽고 세상을 뜨니 때는 1970년 6월 20일 향년 75였다. 1983년 8월 31일 건국공로 대통령표장이 내려졌다. 오늘 국가유공자 묘역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나라에서 지원하여 순국지사의 묘비를 세우게 됨에 공의 장손이 독립운동사료를 불왜에게 보이며 새길 글을 청하매 공의 행적을 기린 나머지 무사를 무릅쓰고 몇줄 적는다. 명하노니
1923년 공은 일제의 감시와 압박이 날로 극심해지자 더 이상 고향에 머물러 활동할수없음을 깨닫고 왜경의 눈을 피해 벽촌인 경북 달성군 가창면으로 들어가 여러 골짝을 전전하면서 이발행상과 엿장수를 가장하여 주민들에게 암암리에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는데 이것이 왜경에게 발각되매 부득이 가창면 냉천동에 이주정착하여 은거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던중 만주땅으로 망명하여 항왜하던 친동생 준업이 일제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비보에 접하고 또 연이어 조카 희모가 부모의 원수를 갚고자 광복군에서 활약하다가 18세의 어린나이로 전사했다는 소식을 받은 공이 몸둘 한치의 땅도 없었다. 냉천골에서 심신을 이끌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이윽고 세상을 뜨니 때는 1970년 6월 20일 향년 75였다. 1983년 8월 31일 건국공로 대통령표장이 내려졌다. 오늘 국가유공자 묘역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나라에서 지원하여 순국지사의 묘비를 세우게 됨에 공의 장손이 독립운동사료를 불왜에게 보이며 새길 글을 청하매 공의 행적을 기린 나머지 무사를 무릅쓰고 몇줄 적는다. 명하노니
나라 있으매 내가 있고 내가 없음에 나라 있다면 내 한 몸 던져서 나라 어이 아니건지리 임의 삶 이러했으니 뒷날의 이 땅 사람들 길이길이 새기소서
배는 밀양박씨 봉수니 제수의 녀로 2남 1녀를 두니 장자 영모는 청송 심현섭 차자 춘모는 성주 이광숙이 그 배이며 녀 순의는 성주 도종균에게 출가하다. 장자에게 손 경영학 박사 병찬과 병훈 병룡이 있고 손녀 약학박사 인자와 인숙 인선이 있다. 차자에게 손 병인과 손녀 한희 한옥이 있다. 병찬에게 자 인규 한규 녀 수정이 있고 병훈에게 자 철규 홍규가 있으며 병인에게 자 은규가 있다
1985년 3월 일 문학박사 달성 서재극이 찬하고 야성 송석희가 서하다
배는 밀양박씨 봉수니 제수의 녀로 2남 1녀를 두니 장자 영모는 청송 심현섭 차자 춘모는 성주 이광숙이 그 배이며 녀 순의는 성주 도종균에게 출가하다. 장자에게 손 경영학 박사 병찬과 병훈 병룡이 있고 손녀 약학박사 인자와 인숙 인선이 있다. 차자에게 손 병인과 손녀 한희 한옥이 있다. 병찬에게 자 인규 한규 녀 수정이 있고 병훈에게 자 철규 홍규가 있으며 병인에게 자 은규가 있다
1985년 3월 일 문학박사 달성 서재극이 찬하고 야성 송석희가 서하다
義士 永川李公 俊石 之墓 配 孺人 密陽朴氏 祔 戌坐
(의사 영천이공 준석 지묘 배 유인 밀양박씨 부 술좌)
(의사 영천이공 준석 지묘 배 유인 밀양박씨 부 술좌)
이준석 지사의 부친이신 이익호 선생 묘소 앞쪽에 이준석 애국지사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