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병기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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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153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곳 월촌마을은 임진때 의병을 일으켜 크게 공을 세운 월곡 우선생의 탄생지이며 경술국치 후 국권회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항거하신 많은 애국지사들이 배출된 충의의 마을이다. 지사의 휘는 병기요 자는 수원이며 호는 월해이고 본관은 단양이다. 선계는 고려 향공진사 휘 현이 시조이시며 누전하여 휘 탁은 동방 이학지조이시며 세칭 역동 선생이시고 시 문희공이시다. 타계에 휘 현보는 려말의 절신으로 두문동 72현의 수좌이시며 청백리이시고 시 충정공이시며 증 영○민이시다. 누대를 거쳐 임란때 의병장으로 원종무등공신에 녹훈되신 휘 배선은 11대조이시다. 지사는 광무 계유 1903년 11월 10일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 1093번지에서 아버지 휘 하충과 어머니 전의이씨의 차남으로 태어나서 숙부 휘 하모에 입계하였다. 천성이 후덕하고 가학에 승습 유염된 바 컸으며 성격이 호쾌하고 효우돈목하여 향당에서 장래가 촉망되었다. 개화기인 시절에는 신학문에 뜻이 있었으나 원로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다가 뜻을 같이한 족친 몇 사람이 동시에 삭발하고 마을에 세워진 덕산사립학교에 입학하였다. 1926년 보국의 꿈을 품고 도일하여 근면 성실한 보람 있어 동경시 황천구 삼하도
정에서 양산대 제조공장을 차려 자수성가하였다. 그 당시 국내외에서 국권회복운동에 활동 중이던 애국지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는 한편 꿈에도 그리던 조국 광복을 위해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무진회와 조선문제시국연구회를 조직하고 동지 규합에 힘쓰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에도 협조하여 오다가 세계 2차대전이 치열하여 국제정세를 관망하던 중 1942년 3월 5일 이 사실을 탐지한 왜경에게 동지 한 사람이 체포되고 연이어 동지 5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로 7년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1943년 12월 10일 기각되어 원심대로 형이 확정되어 청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4년 봄에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으나 잔인한 왜경의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이 뼈골에 숨어들어 악화일로에 이르더니 회복치 못하고 동년 10월 26일 꿈에도 잊지못한 조국 광복을 목전에 두고 한많은 일생을 쓸쓸한 감방에서 지켜보는 사람 하나없이 운명하니 어찌 눈인들 감겼으리요. 애국지사의 말로가 어이 이다지도 험하였는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시울을 붉게 하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바이다. 시신은 대전형무소 공동묘지 일우에 매장되었다가 광복 후 그리던 고향으로 운구 가족장으로 선영인 대덕산 기슭 건좌에 예장하였다. 해방 후 지사의 기간 행적을 알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연고지인 청진○○북이며 대전은 6.25때 잿더미가 되어 일본 동경에 가서 관계기관에 문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지성이면 감천으로 노력한 보람 있어 부산에 있는 국가중요문서보관소에서 판결문 원본을 입수하여 2005년 11월 17일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하였다.
유족으로는 배 경주이씨와 슬하에 1남 4녀로 남에는 종성이고 자부는 인천이씨이다. 장녀는 김해인 김석봉
에게 차녀는 달성인 서창호에게 3녀는 강릉인 유○○에게 4녀는 창녕인 조규홍에게 각각 출가시켰고 손에는 장손 정호 외에 친외손이 30여명에 이른다. 위와 같이 지사의 행적과 가계를 ○기하고 계이 명왈
삼천리 금수강산 ○○들이 짓밟을 때 의분심을 참지못해 적지에서 독립운동
왜경에게 ○○되어 7년형을 받았으나 자나깨나 조국광복 한시인들 잊을소냐
애닯도다 천명이여 국권○복 눈앞두고 옥중에서 순사하니 눈을어찌 감았으리
국가에서 보훈하여 건국훈장 추서하고 ○민세워 천양하니 천추만세 빛나리다
2006년 병술 월
광복회장 김국주 근찬
진성후인 이원흡 근서
순국지사 월해 단양우공 휘 병기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 근수
殉國志士 月海 丹陽禹公 諱 丙基 追慕碑(순국지사 월해 단양우공 휘 병기 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