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1-36
- 탐방로그
- 태극단 학생 독립 운동 기념탑은 대구 하이텍고등학교 기준으로 정문 옆에 있으며, 대구 상원고등학교 기준으로는 건물 뒤편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태극단 학생독립운동기념탑
세움글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1942년 대구공립상업학교의 장한 아들들이 중심이 되어 항일 독립투쟁의 횃불을 밝혔으니, 이름하여 태극단학생 독립운동입니다.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친 태극단 선배님들의 드높은 기개와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며 그 거룩한 뜻을 자자손손 이어갈 것이다. 중앙 및 지방정부의 협조와 4만동문들의 정성을 모아 선배님들의 나라사랑 의지를 기리고자 이 곳에 태극단학생독립운동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을 새로이 세웁니다.
2003년 10월 19일
대구상업정보고등학교 총동창회장 황대현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1942년 대구공립상업학교의 장한 아들들이 중심이 되어 항일 독립투쟁의 횃불을 밝혔으니, 이름하여 태극단학생 독립운동입니다.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친 태극단 선배님들의 드높은 기개와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며 그 거룩한 뜻을 자자손손 이어갈 것이다. 중앙 및 지방정부의 협조와 4만동문들의 정성을 모아 선배님들의 나라사랑 의지를 기리고자 이 곳에 태극단학생독립운동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을 새로이 세웁니다.
2003년 10월 19일
대구상업정보고등학교 총동창회장 황대현
바침글
나라를 빼앗긴 일제36년 수난기, 강제징용·언어말살·창씨개명 등으로 우리민족 역사상 유례가 없는 암흑의 시대에 조국광복을 위하여 10대의 어린 학생들이 결사한 "태극단"은 대구상업학도의 기상이며 이 고장 독립정신의 정맥이었다.
"태극단학생독립운동"은 일제말기의 유일한 학생독립운동으로 결사동기가 뚜렷하고 행동강령이 원대해 어떠한 학생독립운동보다 체계적이며 역사적 의의가 크므로 단순한 학생운동의 차원을 넘어서는 항일독립운동이다.
스물여섯분의 고귀한 뜻을 추앙하고 이상호 단장을 비롯하여 순국하신 네분의 명복을 기원하며 옷깃을 여민다.
2003년 10월 19일
태극단학생독립운동 기념사업 자문위원회 위원장 이종주
나라를 빼앗긴 일제36년 수난기, 강제징용·언어말살·창씨개명 등으로 우리민족 역사상 유례가 없는 암흑의 시대에 조국광복을 위하여 10대의 어린 학생들이 결사한 "태극단"은 대구상업학도의 기상이며 이 고장 독립정신의 정맥이었다.
"태극단학생독립운동"은 일제말기의 유일한 학생독립운동으로 결사동기가 뚜렷하고 행동강령이 원대해 어떠한 학생독립운동보다 체계적이며 역사적 의의가 크므로 단순한 학생운동의 차원을 넘어서는 항일독립운동이다.
스물여섯분의 고귀한 뜻을 추앙하고 이상호 단장을 비롯하여 순국하신 네분의 명복을 기원하며 옷깃을 여민다.
2003년 10월 19일
태극단학생독립운동 기념사업 자문위원회 위원장 이종주
비문(碑文)
1975년 4월 11일 정휘창
아침해 빛나는 이 푸른 언덕에서 맥맥히 자라온 겨레의 얼이여 반만년 깊은 뿌리 비바람에 꺾일소냐. 일찍이 서라벌에 꽃피어 화랑이었고, 여기 새로운 횃불되어 타오르니 그 이름 태극단(太極團)이다.
1942년 왜적의 모진 손톱이 겨레의 숨결마저 끊으려 할 즈음, 바로 이 배움터에서 항거의 칼을 잡고 일어선 봉오리 이상호, 서상교, 김상길, 김정진, 이준윤, 이원연, 윤상룡 등이 중심되어 뭉쳤으니, 뜻은 오직 조국의 독립에 있었고, 길은 다만 죽음을 각오할 따름이었다. 슬기로운 계획과 조직, 날카로운 이론과 방법, 매운 그 기백이 왜적의 간담을 찔렀다. 군사학·과학·체육공부에 더 힘썼으니 그 장한 힘은 겨레의 심장을 지켰다.
1943년 5월 9일 대구 앞산에서 큰 모임을 가지고 가꾸어온 지난날을 가다듬고 싸워서 나갈 앞길을 굳게 다짐하였으니, 젊은 서슬이 삼천리를 덮었고 의로운 기개는 역사의 기둥이 되었다.
아깝다. 큰 깃발을 펴기도 전에 원수에게 탄로되어 갸륵한 새순은 무참히 잘리고 펴진 날개 원통히 찢기었지만, 매운 넋은 더욱 힘차게 소리쳐 티없이 맑은 피가 방울방울 겨레의 가쁜 숨결을 살리었다.
여기 돌을 깎아 자랑스럽게 그 이름을 새긴다.
고구려의 맥박이 이 곳에 뛰고 신라의 목소리가 여기서 울린다. 겨레의 아들 딸들이 고개 숙여 우러러 받들지니 태극단 그 이름 길이길이 이 땅에서 푸르리라.
1975년 4월 11일 정휘창
아침해 빛나는 이 푸른 언덕에서 맥맥히 자라온 겨레의 얼이여 반만년 깊은 뿌리 비바람에 꺾일소냐. 일찍이 서라벌에 꽃피어 화랑이었고, 여기 새로운 횃불되어 타오르니 그 이름 태극단(太極團)이다.
1942년 왜적의 모진 손톱이 겨레의 숨결마저 끊으려 할 즈음, 바로 이 배움터에서 항거의 칼을 잡고 일어선 봉오리 이상호, 서상교, 김상길, 김정진, 이준윤, 이원연, 윤상룡 등이 중심되어 뭉쳤으니, 뜻은 오직 조국의 독립에 있었고, 길은 다만 죽음을 각오할 따름이었다. 슬기로운 계획과 조직, 날카로운 이론과 방법, 매운 그 기백이 왜적의 간담을 찔렀다. 군사학·과학·체육공부에 더 힘썼으니 그 장한 힘은 겨레의 심장을 지켰다.
1943년 5월 9일 대구 앞산에서 큰 모임을 가지고 가꾸어온 지난날을 가다듬고 싸워서 나갈 앞길을 굳게 다짐하였으니, 젊은 서슬이 삼천리를 덮었고 의로운 기개는 역사의 기둥이 되었다.
아깝다. 큰 깃발을 펴기도 전에 원수에게 탄로되어 갸륵한 새순은 무참히 잘리고 펴진 날개 원통히 찢기었지만, 매운 넋은 더욱 힘차게 소리쳐 티없이 맑은 피가 방울방울 겨레의 가쁜 숨결을 살리었다.
여기 돌을 깎아 자랑스럽게 그 이름을 새긴다.
고구려의 맥박이 이 곳에 뛰고 신라의 목소리가 여기서 울린다. 겨레의 아들 딸들이 고개 숙여 우러러 받들지니 태극단 그 이름 길이길이 이 땅에서 푸르리라.
비문(碑文)
1975년 4월 11일 정휘창
아침해 빛나는 이 푸른 언덕에서 맥맥히 자라온 겨레의 얼이여 반만년 깊은 뿌리 비바람에 꺾일소냐. 일찍이 서라벌에 꽃피어 화랑이었고, 여기 새로운 횃불되어 타오르니 그 이름 태극단(太極團)이다.
1942년 왜적의 모진 손톱이 겨레의 숨결마저 끊으려 할 즈음, 바로 이 배움터에서 항거의 칼을 잡고 일어선 봉오리 이상호, 서상교, 김상길, 김정진, 이준윤, 이원연, 윤상룡 등이 중심되어 뭉쳤으니, 뜻은 오직 조국의 독립에 있었고, 길은 다만 죽음을 각오할 따름이었다. 슬기로운 계획과 조직, 날카로운 이론과 방법, 매운 그 기백이 왜적의 간담을 찔렀다. 군사학·과학·체육공부에 더 힘썼으니 그 장한 힘은 겨레의 심장을 지켰다.
1943년 5월 9일 대구 앞산에서 큰 모임을 가지고 가꾸어온 지난날을 가다듬고 싸워서 나갈 앞길을 굳게 다짐하였으니, 젊은 서슬이 삼천리를 덮었고 의로운 기개는 역사의 기둥이 되었다.
아깝다. 큰 깃발을 펴기도 전에 원수에게 탄로되어 갸륵한 새순은 무참히 잘리고 펴진 날개 원통히 찢기었지만, 매운 넋은 더욱 힘차게 소리쳐 티없이 맑은 피가 방울방울 겨레의 가쁜 숨결을 살리었다.
여기 돌을 깎아 자랑스럽게 그 이름을 새긴다.
고구려의 맥박이 이 곳에 뛰고 신라의 목소리가 여기서 울린다. 겨레의 아들 딸들이 고개 숙여 우러러 받들지니 태극단 그 이름 길이길이 이 땅에서 푸르리라.
1975년 4월 11일 정휘창
아침해 빛나는 이 푸른 언덕에서 맥맥히 자라온 겨레의 얼이여 반만년 깊은 뿌리 비바람에 꺾일소냐. 일찍이 서라벌에 꽃피어 화랑이었고, 여기 새로운 횃불되어 타오르니 그 이름 태극단(太極團)이다.
1942년 왜적의 모진 손톱이 겨레의 숨결마저 끊으려 할 즈음, 바로 이 배움터에서 항거의 칼을 잡고 일어선 봉오리 이상호, 서상교, 김상길, 김정진, 이준윤, 이원연, 윤상룡 등이 중심되어 뭉쳤으니, 뜻은 오직 조국의 독립에 있었고, 길은 다만 죽음을 각오할 따름이었다. 슬기로운 계획과 조직, 날카로운 이론과 방법, 매운 그 기백이 왜적의 간담을 찔렀다. 군사학·과학·체육공부에 더 힘썼으니 그 장한 힘은 겨레의 심장을 지켰다.
1943년 5월 9일 대구 앞산에서 큰 모임을 가지고 가꾸어온 지난날을 가다듬고 싸워서 나갈 앞길을 굳게 다짐하였으니, 젊은 서슬이 삼천리를 덮었고 의로운 기개는 역사의 기둥이 되었다.
아깝다. 큰 깃발을 펴기도 전에 원수에게 탄로되어 갸륵한 새순은 무참히 잘리고 펴진 날개 원통히 찢기었지만, 매운 넋은 더욱 힘차게 소리쳐 티없이 맑은 피가 방울방울 겨레의 가쁜 숨결을 살리었다.
여기 돌을 깎아 자랑스럽게 그 이름을 새긴다.
고구려의 맥박이 이 곳에 뛰고 신라의 목소리가 여기서 울린다. 겨레의 아들 딸들이 고개 숙여 우러러 받들지니 태극단 그 이름 길이길이 이 땅에서 푸르리라.
태극단 단원
단장 이상호 李相虎, 관방국장 김상길 金相吉, 체육국장 서상교 徐尙教
비서장 김정진 金正鎭, 과학국장 이준윤 李浚允, 단원 이원현 李元鉉
단원 윤삼룡 尹三龍, 부관 이태원 李兌遠, 단원 정광해 鄭光海
단원 정환진 鄭晥鎭, 항공부장 최두환 崔斗煥, 단원 김광연 金廣淵
단원 김정하 金井夏, 단원 안광선 安光璿, 단원 정병준 鄭炳準
단원 황칠암 黃七岩, 단원 김종우 金鍾宇, 단원 이상학 李相鶴
단원 이응락 李應洛, 단원 하두영 河斗永, 단원 노정열 盧定烈
단원 강기인 姜基仁, 단원 박규인 朴圭仁, 단원 박상포 朴商包
단원 손문호 孫文鎬, 단원 안창용 安昌鏞
단장 이상호 李相虎, 관방국장 김상길 金相吉, 체육국장 서상교 徐尙教
비서장 김정진 金正鎭, 과학국장 이준윤 李浚允, 단원 이원현 李元鉉
단원 윤삼룡 尹三龍, 부관 이태원 李兌遠, 단원 정광해 鄭光海
단원 정환진 鄭晥鎭, 항공부장 최두환 崔斗煥, 단원 김광연 金廣淵
단원 김정하 金井夏, 단원 안광선 安光璿, 단원 정병준 鄭炳準
단원 황칠암 黃七岩, 단원 김종우 金鍾宇, 단원 이상학 李相鶴
단원 이응락 李應洛, 단원 하두영 河斗永, 단원 노정열 盧定烈
단원 강기인 姜基仁, 단원 박규인 朴圭仁, 단원 박상포 朴商包
단원 손문호 孫文鎬, 단원 안창용 安昌鏞
태극단 연대기
1941년 12월 월 이상호 단장이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정신과 손문의 상민주의에 영향을 받고 독립운동을 결심
1942년 5월 1일 이상호 단장이 결사단체를 조직카로 하고 동지 규합을 시작
1943년 4월 20일 조직을 결성, 단장과 3국 3관 8부를 두고 단명을 구한말의 태극기를 상징하여 "태극단"으로 정하고 강령을 채택
1943년 5월 9일 앞산에서 회합, 6월 6일 결단식 거행결의
1943년 5월 19일 총 규합인원이 26명에 이름
1943년 5월 23일 이상호 단장 체포 구금
1943년 5월 25일 태극단 간부 등 9명 체포 구금
1943년 5월 27일 단원 전원 체포 구금
1943년 5월 28일 16명 석방, 주모자 10명 고문 조사
1943년 10월 2일 이준윤 단원이 고문후유증으로 병보석 출감 3일만에 운명
1944년 1월 10일 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미성년자 법정최고형인 단기 5년 장기 10년 등의 중형이 선고됨
1945년 2월 하순 이창호 단장이 일경의 모진 고문과 옥고에 따른 늑막염 등의 합병으로 사경에 이르러 병보석으로 출감
1945년 5월 5일 이원현 단원이 일경의 모진 고문과 옥고에 따른 늑막염으로 병보석 출감 35일만에 운명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나머지 단원 석방
1945년 12월 9일 이상호 단장이 고문과 옥고에 의한 병마로 운명[19세]. 시민의 애도 속에 해방 후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례
1947년 7월 중순 윤삼룡 단원이 모진 고문과 옥고에 따른 복막염으로 운명
1963년 3월 1일 독립유공자 포상 [건국훈장 독립장, 애족장 등 수훈]
1969년 1월 20일 이상호 이준윤 이원현 등 세 분의 명령과 생존단원 김상길, 서상교, 김정진 등 세 분에게 대구상업고등학교 특별명예 졸업장 수여
1972년 4월 17일 태극단을 주도한 17회 동기회의 발의로 태극단기념사업을 추진
1975년 4월 11일 교정에 태극단학생독립운동 기념탑 및 비문 제막
2000년 1월 9일 일제는 민중의 봉기를 우려해 태극단의 결사를 극비에 부쳤고, 해방 후에는 좌우익의 이념대립 등 사회적인 여건으로 태극단의 진의가 묻혀 이를 현창코자 대구상고동창회에서 태극단학생독립운동의 재정립을 발원
2001년 5월 9일 태극단학생독립운동 자료집 발간
2003년 10월 19일 대구상고 개교 80주년에 즈음하여 이 운동의 기념공원을 조성, ‘태극단학생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이름 짓고 기념탑을 새로이 건립
1941년 12월 월 이상호 단장이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정신과 손문의 상민주의에 영향을 받고 독립운동을 결심
1942년 5월 1일 이상호 단장이 결사단체를 조직카로 하고 동지 규합을 시작
1943년 4월 20일 조직을 결성, 단장과 3국 3관 8부를 두고 단명을 구한말의 태극기를 상징하여 "태극단"으로 정하고 강령을 채택
1943년 5월 9일 앞산에서 회합, 6월 6일 결단식 거행결의
1943년 5월 19일 총 규합인원이 26명에 이름
1943년 5월 23일 이상호 단장 체포 구금
1943년 5월 25일 태극단 간부 등 9명 체포 구금
1943년 5월 27일 단원 전원 체포 구금
1943년 5월 28일 16명 석방, 주모자 10명 고문 조사
1943년 10월 2일 이준윤 단원이 고문후유증으로 병보석 출감 3일만에 운명
1944년 1월 10일 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미성년자 법정최고형인 단기 5년 장기 10년 등의 중형이 선고됨
1945년 2월 하순 이창호 단장이 일경의 모진 고문과 옥고에 따른 늑막염 등의 합병으로 사경에 이르러 병보석으로 출감
1945년 5월 5일 이원현 단원이 일경의 모진 고문과 옥고에 따른 늑막염으로 병보석 출감 35일만에 운명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나머지 단원 석방
1945년 12월 9일 이상호 단장이 고문과 옥고에 의한 병마로 운명[19세]. 시민의 애도 속에 해방 후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례
1947년 7월 중순 윤삼룡 단원이 모진 고문과 옥고에 따른 복막염으로 운명
1963년 3월 1일 독립유공자 포상 [건국훈장 독립장, 애족장 등 수훈]
1969년 1월 20일 이상호 이준윤 이원현 등 세 분의 명령과 생존단원 김상길, 서상교, 김정진 등 세 분에게 대구상업고등학교 특별명예 졸업장 수여
1972년 4월 17일 태극단을 주도한 17회 동기회의 발의로 태극단기념사업을 추진
1975년 4월 11일 교정에 태극단학생독립운동 기념탑 및 비문 제막
2000년 1월 9일 일제는 민중의 봉기를 우려해 태극단의 결사를 극비에 부쳤고, 해방 후에는 좌우익의 이념대립 등 사회적인 여건으로 태극단의 진의가 묻혀 이를 현창코자 대구상고동창회에서 태극단학생독립운동의 재정립을 발원
2001년 5월 9일 태극단학생독립운동 자료집 발간
2003년 10월 19일 대구상고 개교 80주년에 즈음하여 이 운동의 기념공원을 조성, ‘태극단학생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이름 짓고 기념탑을 새로이 건립
설계 제작 조각가 김윤화
탑명 글씨 성재 정계조
탑명 글씨 성재 정계조
태극단 학생독립운동기념탑
태극단 학생독립운동기념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