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달서구 두류동 산309-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건립개요
동상 앞면 글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휘호하셨고 비문은 문희갑 대구광역시장이 짓고 민족혼의 횃불 시는 권쾌복 광복회장이 짓고 당신께 바치는 글은 애국지사의 아들 박정용이 짓고 설계와 조각은 홍익대 미대 최기원 교수가 제작하다.
대구광역시 : 심의필 1966.11.4
대구광역시 : 인가 필 공원 제 1997-8호
1997년 8월 15일 건립
동상 앞면 글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휘호하셨고 비문은 문희갑 대구광역시장이 짓고 민족혼의 횃불 시는 권쾌복 광복회장이 짓고 당신께 바치는 글은 애국지사의 아들 박정용이 짓고 설계와 조각은 홍익대 미대 최기원 교수가 제작하다.
대구광역시 : 심의필 1966.11.4
대구광역시 : 인가 필 공원 제 1997-8호
1997년 8월 15일 건립
愛國志士 朴喜光 先生 像(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상)
당신께 바치는 글
사랑하는 아버지!
당신은 오직 빼앗긴 강토를 되찾기 위해 조국 독립 투쟁을 하셨고 청춘을 차디찬 감옥에서 불사르셨습니다.
어제나 그제나 광복을 위해 싸우셨고 내일을 향해 통일을 염원하시며 기다리시던 모습 선연합니다.
한많은 세월 동안 당신의 눈가에 맺힌 이슬과 깊이 패인 주름들이 말해 주듯이 통일은 우리의 지상과제이며 꼭 이루어야 할 대업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 이 조국 이 강산의 민족 통일과 밝은 내일을 위해 이한몸 다 바치리라"고 다짐하시던 그 말씀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존경하는 아버지 어느 날 어린 저의 손을 잡고 외가로 가는 오솔길에서 한 바가지 옹달샘 물로 허기를 때우시며 미소를 머금어시던 모습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이제는 은종이 가득한 하늘 나라에서 통일의 그 날까지 편안하소서.
아들 박정용
사랑하는 아버지!
당신은 오직 빼앗긴 강토를 되찾기 위해 조국 독립 투쟁을 하셨고 청춘을 차디찬 감옥에서 불사르셨습니다.
어제나 그제나 광복을 위해 싸우셨고 내일을 향해 통일을 염원하시며 기다리시던 모습 선연합니다.
한많은 세월 동안 당신의 눈가에 맺힌 이슬과 깊이 패인 주름들이 말해 주듯이 통일은 우리의 지상과제이며 꼭 이루어야 할 대업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 이 조국 이 강산의 민족 통일과 밝은 내일을 위해 이한몸 다 바치리라"고 다짐하시던 그 말씀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존경하는 아버지 어느 날 어린 저의 손을 잡고 외가로 가는 오솔길에서 한 바가지 옹달샘 물로 허기를 때우시며 미소를 머금어시던 모습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이제는 은종이 가득한 하늘 나라에서 통일의 그 날까지 편안하소서.
아들 박정용
겨레여 뭉치자.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자. 만주벌에서 외치던 항일 독립투사의 그 목소리가 여기 두류산에 메아리치고 있다. 그 이름 박희광(朴喜光)이다.
1901년 2월 15일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으니 밀양박씨 경주부윤 박수홍(朴守弘)의 11세손이며 윤하(胤夏)의 다섯째 아들이다. 여덟살 때 어버이와 함께 중국 만주땅으로 망명, 낯선 하늘 거친 벌판에서 가난의 아픔과 나라 잃은 설움을 씹으며 자랐다.
1919년 약관 18세의 나이로 분연히 일어서 대한독립군 통의부에 입대하여 여섯해 동안 무장 전투원으로서 혹은 특수 유격대원으로 경격 작전에 참가, 왜적과 맞서 싸우고 군수품을 탈튀하였을 뿐 아니라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들을 응징하고 만절 연선에서 폭파를 하는가 하면 심양(봉천) 일본 총영사관에 폭탄을 던져 우리의 매운 얼을 떨치었으며 그 후 이등박문의 수양녀인 배정자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1924년 6월 1일 일본 경찰의 악질 밀절 정갑주를 겨레의 이름으로 처단하고 그 달 7일 일진회의 주동자인 민족반역자 최정규를 찾아 권총으로 쏘았다.
침약자의 우두머리들이 드나들던 요정(금정관)을 급습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마련하던 중 적군과 마주쳐 총격전이 벌어져 불행하게도 현장에서 피체되어 관동정 법원에서 1심에 사형, 2심에 무기형을 언도받고 20여년간 옥고의 악독한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끝끝내 조직의 비밀을 지켰다. 1943년 출옥하여 광복을 맞았으나 공을 내세우지 않고 초야에 묻혀 어렵게 살다가 1970년 1월 22일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고구려 옛터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피 흘렸고 스무해 모진 옥고 이겨냈지만 말없이 살다가 가시었다. 매운 넋 꿋꿋이 이곳에 서서 언제나 민족혼의 기둥 되리라. 이 자리에 민족 해방과 더불어 환국한 이후 여생을 보내던 달구벌에서 뜻있는 분들과 학생 및 범 시민들의 정성으로 이 곳 두류산 금봉자락에 터를 잡아 동상을 세우다.
1997년 8월 15일 대구광역시장 문희갑
1901년 2월 15일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으니 밀양박씨 경주부윤 박수홍(朴守弘)의 11세손이며 윤하(胤夏)의 다섯째 아들이다. 여덟살 때 어버이와 함께 중국 만주땅으로 망명, 낯선 하늘 거친 벌판에서 가난의 아픔과 나라 잃은 설움을 씹으며 자랐다.
1919년 약관 18세의 나이로 분연히 일어서 대한독립군 통의부에 입대하여 여섯해 동안 무장 전투원으로서 혹은 특수 유격대원으로 경격 작전에 참가, 왜적과 맞서 싸우고 군수품을 탈튀하였을 뿐 아니라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들을 응징하고 만절 연선에서 폭파를 하는가 하면 심양(봉천) 일본 총영사관에 폭탄을 던져 우리의 매운 얼을 떨치었으며 그 후 이등박문의 수양녀인 배정자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1924년 6월 1일 일본 경찰의 악질 밀절 정갑주를 겨레의 이름으로 처단하고 그 달 7일 일진회의 주동자인 민족반역자 최정규를 찾아 권총으로 쏘았다.
침약자의 우두머리들이 드나들던 요정(금정관)을 급습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마련하던 중 적군과 마주쳐 총격전이 벌어져 불행하게도 현장에서 피체되어 관동정 법원에서 1심에 사형, 2심에 무기형을 언도받고 20여년간 옥고의 악독한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끝끝내 조직의 비밀을 지켰다. 1943년 출옥하여 광복을 맞았으나 공을 내세우지 않고 초야에 묻혀 어렵게 살다가 1970년 1월 22일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고구려 옛터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피 흘렸고 스무해 모진 옥고 이겨냈지만 말없이 살다가 가시었다. 매운 넋 꿋꿋이 이곳에 서서 언제나 민족혼의 기둥 되리라. 이 자리에 민족 해방과 더불어 환국한 이후 여생을 보내던 달구벌에서 뜻있는 분들과 학생 및 범 시민들의 정성으로 이 곳 두류산 금봉자락에 터를 잡아 동상을 세우다.
1997년 8월 15일 대구광역시장 문희갑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1901-1970) 약력
본명 : 박희광(朴喜光) 일명: 상만(相萬)
1901.2.15 구미시 선주동 (봉곡) 출생
1916. 만주 봉천성 남성자학교 졸업
1919. 18세때 임시정부 조선독립단 릉의 특공대원 활약
1919~1924 상해임시정부 지령에 따라 만철 연선에서 수차례 일본군 공격작전 참가
1920.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폭탄투척
1923. 이등박문의 수양녀 매국의 요화 배정자 암살 실행을 하였으나 실패
1924.6.1 민족반역자 정갑주와 가족 총살
1924.6.7. 매국단체인 일진회 보민단 회장 최정규 가족 총살
1924. 일본 요정 금정관에 침입 군자금 징수. 중국경찰, 일본군과 총격전 중 피채 증거물(권총 3자루, 탄알 160발, 폭탄 1개, 사형선고문 수매)
1926. 관동지방법원 1심 사형, 2심 무기형 언도
1924-1943 여순형무소에서 20여년간 복역 출옥
1968.3.1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
1970.1.22 70세에 일제 고문 후유증 재발로 서울보훈병원에 입원 진료 중 별세(동작동 국립묘지에 부인과 합장)
1973.3.1.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愛國志士朴喜光先生之像(애국지사박희광선생지상)" 친필휘호와 하사금 받아 동상 제작
본명 : 박희광(朴喜光) 일명: 상만(相萬)
1901.2.15 구미시 선주동 (봉곡) 출생
1916. 만주 봉천성 남성자학교 졸업
1919. 18세때 임시정부 조선독립단 릉의 특공대원 활약
1919~1924 상해임시정부 지령에 따라 만철 연선에서 수차례 일본군 공격작전 참가
1920.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폭탄투척
1923. 이등박문의 수양녀 매국의 요화 배정자 암살 실행을 하였으나 실패
1924.6.1 민족반역자 정갑주와 가족 총살
1924.6.7. 매국단체인 일진회 보민단 회장 최정규 가족 총살
1924. 일본 요정 금정관에 침입 군자금 징수. 중국경찰, 일본군과 총격전 중 피채 증거물(권총 3자루, 탄알 160발, 폭탄 1개, 사형선고문 수매)
1926. 관동지방법원 1심 사형, 2심 무기형 언도
1924-1943 여순형무소에서 20여년간 복역 출옥
1968.3.1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
1970.1.22 70세에 일제 고문 후유증 재발로 서울보훈병원에 입원 진료 중 별세(동작동 국립묘지에 부인과 합장)
1973.3.1.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愛國志士朴喜光先生之像(애국지사박희광선생지상)" 친필휘호와 하사금 받아 동상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