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달서구 두류동 산209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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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백남채의 구 묘비가 남아있으며, 대구 두류공원 자락길에 있다.
백남채의 묘소는 1992년 7월 8일에 국립대전현충원으로 독립유공자 1묘역(묘비번호 381)으로 이장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愛國志士 石泉 白南埰 長老 墓(애국지사 석천 백남채 장로 묘)
석천 백남천 장로는 풍운감도는 구한말 1888년 1월 1일 경북 경산군 용성면 송림동에서 수원백씨 중시조 昌稷(창직)공의 27세손인 龍達(용달)공과 자당 안순이 여사 사이에 4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하시었으니 자는 성숙 호는 석천이시다. 장로는 기골이 장대하시고 성품이 활달 사소한 일에는 구애를 받지 않으시었다. 유시에 한학을 수학하시고 대구계성학교를 졸업 후 청운의 뜻을 품고 1910년 북경대학으로 유학 상해와 국내의 애국지사들과 유대 독립운동 전선에 투신하시었다. 대학졸업후 귀국하여 모교인 계성학교에서 봉직 교감을 역임하시었다. 대구남산교회 장로로 계시면서 기미독립운동 직전인 2월 상해로부터 귀국한 弟 남규 김규식 박사 부인 김순애 동경에서 파견된 김마리아 서울서 온 이갑성 대구의 서병우 이만집 등과 남산교회 지하실에서 회동 거사를 숙의 항일의 거점이 된 봉직 중인 계성학교를 독립운동 대구본부로 정하고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등사하여 대구와 인근 칠곡 인동 등지
까지 배부하는 한편 대구고보 신명학교 등 학생대표에게 학생동원의 책임을 부여하였다. 서울에서 3.1봉화가 오르자 장로는 삼엄한 일경의 감시를 피하면서 이만집등과 회동 3월 8일 큰장날 오후 1시를 기해 거사키로 합의 주도하게 준비중 3일 전에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장로의 주도하에 계획된 자주독을 절규하는 노도와 같은 대구의 만세운동은 성공적으로 수행행되었으며 그후 장로는 대구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셨으니 혹독한 고문이며 엄청난 고애이야 어찌 필설로 표하리오 출옥후에도 빈번한 예비구금을 당하는 등 집요한 일제의 감시와 옥고로 초췌해진 몸을 이끌고 백척불굴 애국운동은 계속되었다. 북경에서 연두공장을 경영하며 그 이윤으로 상해임정에 자금조달과 일제압박으로 곤경에 처해있던 계성학교의 재정을 돕는 한편 YMCA운동 대구상업협회 결성 조양회관 건립에 주도적 역활을 담당 민족혼의 진작에 온갖 심혈을 기울렸으나 이는 살신정인 멸사보국하신 장로의 숭고한 애국애정의 발로인지라 어찌 이땅에 태어난 후세만인의 귀감이라 아니이르랴. 장로는 계성학교에서 교감 이사 이사장을 역임하시고 또 희도학교의 설립자이시며 건축 명성회장으로 남산교회를 설립하셨고 도당회장을 맡으시는 등 육영과 전도사업에도 힘쓰시었으며 광복 후 혼란기에는 경북 치안유지 회장 및 과도 미군정에도 관여하시고 입력위원 제헌국회의원 등으로 초창기 건국사업에 헌신하시다가 6.25동란 중 서울에서 대구까지 도보로 탈출하시어 피로 기진으로 1951년 10월 2일 향년 63세로 간난과 영광의 생애를 마치시니 장로의 업적을 기리도록 정부에서는 대통령표창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
으나 장로를 숭모하는 겨례들의 涕泣(체읍)을 달래지는 못했다. 장로는 실로 민족의 거목이요 우리 대구의 자랑이시라 이제 가신님의 자취를 한 조각 돌에 새기어 달구벌 넓은 들판위에 우뚝 세우니 그 이름이여 청사에 영원할진저 슬하에 2남 5녀를 두니 장남 준기는 의학박사로 유지를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활약이 현저하고 차남 현기는 교육학박사로 국제연합에서 국위를 선양 중이며 그 아래로 손 증손이 번성하니 이 또한 살신보국하신 장로의 충성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랴.
1888년 1월 1일 출생 1951년 1월 2일 소천
서기 1975년 5월 일 원곡 김기승 찬 병서
1888년 1월 1일 출생 1951년 1월 2일 소천
서기 1975년 5월 일 원곡 김기승 찬 병서
長老 水原白公 南埰 之墓(장로 수원백공 남채지묘)
대구광역시 문화예술회관
백남채 애국지사의 묘소는 이곳에 있다가, 1992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