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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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산151-9
탐방로그
부자 관계인 양진여와 양상기의 묘는 앞뒤로 나란히 위치해있는데, 앞이 아들 양상기의 묘이고, 뒤가 아버지 양진여의 묘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의병장이 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한 이야기가 뭉클하게 다가온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義兵將 濟州梁公 相基 之墓(의병장 제주양공 상기 지묘)

의병장 양공 상기 순절비명
왜적에게 국권이 능침된 오욕과 통분의 시절을 부자가 함께 목숨을 바쳐 민족의 저력을 남김없이 발휘한 참다운 의열과 민족혼의 정수가 여기에 있다. 장하여라 이분 설죽 양상기장군은 호남의 한말의병장 서암 양진여공의 장녀로서 서기1883년 10월 10일 광주시 중흥동에서 출생하셨다. 공은 천품이 정강명민하여 일찌기 항일구국의 큰 뜻을 품고 부군이 세운 풍정암에서 병서를 배우고 무예를 닦았다. 이윽고 부자가
함께 거의할 것을 굳게 다짐하고 왜경에 위장침투 의병에게 무기와 정보를 제공하다가 탄로되자 재빨리 그곳을 탈출 부친의 막하에 들어가 훈련대장이 되셨다. 이듬해 서기 1908년 4월에는 추거에 따라 독립부대를 창설 전해산부대와 합세하여 동복 화순 곡성 담양등지의 왜군을 공격하여 많은 전적을 올렸다. 동년 11월에는 200여명의 정예의병을 거느리고 부친과의 연합작전을 수행하여 광주수비대와 접전 대승하였고 전후 3년간에 걸쳐 도내 각지를 전전하여 사자분신의 혁혁한 전과를 세웠으나 원통할손 일제의 소위 호남의병대토벌작전을 만나 1909년 12월 24일 전북 남원군 통한면 도통리에서 왜군대부대와 교전중 피체되어 1910년 8월 1일 대구형무소에서 향년27세를 일기로 형사하시니... 부자가 2개월의 간격을 두고 순절하신것이다. 묻노니 망국의 한이 서린 한말 정복자의 말발굽소리만이 이땅을 휩쓸고 있을때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위하여 대한제국만세를 외치며 쓰러지는 피의 절규에 행여 귀를 막고 대문을 닫아건 망패의 비정은 없었던가 우리는 이 두분 부자의병장의 절륜의 애국충절에서 인생의 관성을 넘어선 인간의지의 위대한 현시를 보았고 이곳은 한날 인신의 영역이 아닌 민족기사의 성지로서 길이 숭상되고 경배되어야할 버젓한 당위를 갖는다.
광복후 서기 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으며 공의 위업을 기리는 첨종제현의 뜻을 모아 금사일용군의 효애와 정성으로 이 비를 세우다.
서기 1983년 11월 일 흥성인 장재철 근찬
사자 일용 근서, 제주양씨 금성군파 종친회 근수
헌성록 영준 용택 재동 재열 봉렬 성옥
殉國父子 義兵長 梁振汝 相基 墓所 入口(순국부자 의병장 양진여 상기 묘소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