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원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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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광주광역시 서구 농성동 645-1
탐방로그
김태원 동상은 농성역 앞에 있는 농성광장에 있다. 본명은 준(準), 성인식(20세에 치르는 관례)때 윗사람이 그 사람의 기호나 덕을 고려하여 붙여주는 이름인 자는 김준이다. 김태원은 동생 김율과 함께 처음에는 기삼연 장군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다가 나중에는 독립하여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저 멀리 어등산을 바라보며 우뚝 선 의병장 김태원 장군은 호남의 산과 들을 義鄕(의향)으로 다시 피워낸 한말 항일정신의 표상이다. 장군의 본관은 경주요 이름은 준과 태중이며 호는 죽봉 태원은 자이다. 1870년 나주에서 태어나 함평에서 성장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학문이 출중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굳건한 기상과 정의감이 몸에 밴 장군은 일찍이 동학농민혁명에 투신했고 그 후에도 사회적 폐단을 바로잡는데 앞장 섰다. 국권을 빼았기자 장군은 김돈 등 동지들과 상의한 후 1907년 10월 아우 청 “봉율”과 함께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을 맡았다. 구례 문수사 전투에서 크게 이긴 장군은 기세를 몰아 고창, 법성포, 장성, 영광, 함평, 담양등지를 차례로 점령하며 반일의병항쟁을 주도하였다. 특히 1908년 설날 담양 무동촌 전투에서 강력하기로 기록될 쾌거를 거두었으며 장성 토촌전투의 빛나는 승리로 호남의병의 이름을 전국에 떨쳤다. 의병장 기삼연의 순국을 전후하여 장군은 호남의소의 이름으로 독립 동생 율과 각각 수백명씩의 군사를 이끌고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사람들은 죽봉부대를 참봉진 청봉부대를 박사진이라 불렀다. 죽봉 장군은 지략에 감복한 의병들과 애민정신을 흠모한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호남 각지에 수십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승리로 장식했다. 호남의병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자 간담이 서늘해진 일제는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혈전을 계속하던 장군은 1908년 광주 어등산에서 중무장한 특설순사대에 포위되어 끝까지 맞서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김해도를 비롯한 수십명의 의병들도 함께 산화하였으니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죽봉이 순국하기 한달전 피체되었던 청봉마져도 장군의 시신을 확인시킨 일본군경에 의해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형제의 의로움은 대숲의 청청함이 쌍봉에 우뚝 솟음과 같으니 진전 하늘이 낸 충신이다. 김태원의 부인 낙안오씨도 어린 남매를 키운 후 '나라가 망했으니 살아남을 이유가 없다'며 남편의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이 어찌 고의충절이 아니겠는가 죽봉 청봉 일가는 마땅히 호남제일 의가로 기려야 할 것이다. 정부는 한말 의병장 김태원 김율 형제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이에 조국과 겨레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임의 넋을 기리고 정의와 자주정신을 영원한 귀감으로 삼고자 김태원 장군상을 다시 세운다.
1998년 12월 3일 김태원 장군 순국 90주년을 맞아 사학자 홍영기 짓고 학정 이돈흥 쓰다
짧은 생애를 나라 위해 바치신 김태원 장군을 기리는 마음 날로 더하여 뜻있는 이들의 정성을 모으고 정부와 광주시의 지원을 받아 여기 장하신 상을 세웁니다.
마지막 순절하신 무등산을 향해 서 계신 임의 충의를 길이 전하고 조국의 영광을 우리 함께 지키오리다.
1975년 6월 20일 김태원 장군상을 건립한 후 훼손되어 1998년 12월 10일 조각가 전병근의 작품을 동상으로 재 건립하다.
죽봉 김태원 의병장 기념사업회
1975년 건립한 죽봉 김태원 장군상 의적사업 추진위원회
● 회장 : 김기창 ● 부회장 : 김달하 김종식 류제영 이영헌 ● 총무위원 : 김병순 김영환 김윤영 ● 재무위원 : 김상숙 김승제 김호영 ● 섭외의원 : 김길주 김영철 박도동 서상민 신동일 윤석기 정지회 정해영
죽봉 장군상 건립 의성금 제명록
강두팔 강영철 고영두 고일석 고제철 광화현 곽남호 권계수 권승관 김옥 김계렬 김광렬 김귀봉 김기석 김기창 김기환 김길주 김남성 김달하 김동식 김동운 김록호 김만삼 김병순 김병욱 김병조 김복용 김복제 김상권 김상균 김상숙 김상순 김상순 김상준 김상준 김석두 김석렬 김순철 김승제 김시영 김양춘 김영국 김영만 김용덕 김용승 김윤기 김윤문 김윤수 김윤영 김인기 김인제 김일환 김장현 김정덕 김정동 김정암 김정윤 김정표 김정환 김제윤 김종근 김종식 김종태 김주만 김준형 김중렬 김창호 김채열 김탁하 김택렬 김학범 김학실 김해풍 김현철 김형기 김호근 김홍주 김희욱 노희원 마동렬 마형렬 박철 박기석 박남순 박동복 박병규 박상구 박월신 박인천 박제범 박헌동 박수만 백낙승 백유인 백하규 서남철 서정수 송인섭 신동일 신승호 신태호 신후풍 심상기 심재옥 류년중 윤성윤 윤하중 이광국 이길재 이남행 이득용 이병식 이상진 이여현 이원휘 이인섭 이재노 이정균 이창술 이한주 임광행 장희채 전운종 전창수 정종팔 정태영 정해용 조운태 조한종 진봉자 차남수 천보배 최경식 최기영 최상옥 최순남 최정기 최태근 추진수 한영규 허필성
경주김씨전남도종친회, 광산노인당, 광주시중고교장, 광주은행, 광주호남노인당, 장흥지동문중, 종심회, 진도분사리문중, 한국세무사회광주지회, 함평나산충의사, 화순군종친회, 화순도곡문중, 화순동복노인당
죽봉 김태원 의병장 동상
관리번호: 50-1-09 / 관리자: 죽봉 김태원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곳은 1906년 함평과 나주를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전라도 일대에서 일본군경과 40여회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호남의병의 대표적 의병장 죽봉(竹峰) 김태원(金泰元) 장군의 숭고한 애국(愛國) 애족(愛族) 정신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건립한 광장입니다.
정부는 1908년 4월 25일 광주시 광산구 어등산에서 일군(日軍)과 맞서 끝까지 전투를 벌이던 중 적의 흉탄에 의해 순국하신 장군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이곳을 찾아주신 분들께서는 대일(對日) 항쟁기때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의병장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고, 보존과 청결에도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竹峰 金泰元 義兵將(죽봉 김태원 의병장)
이 동상 건립 당시 장군상을 만들 때, 실제 모습을 알 길이 없어서 장군의 아드님과 손자의 얼굴 모습을 기본 골격으로 하여 장군의 얼굴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與舍弟心書(여사제심서)
國家安危在頃刻 (국가안위재경각,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意氣男兒何待亡 (의기남아하시망, 의기남아가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盡忠竭力義當事 (진충갈력의당사, 온힘을 쏟아 충성을 다하는것이 의의 마땅한 일이니)
志濟蒼生不爲名 (지제창생붕위명,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뿐 명예를 위하는것은 아니라네)
兵死地含笑入地可也(병사지함소입지가야, 전쟁은 죽으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는것이 옳으리라)
戊申 二月十九日 舍兄金準書(무신년 2월19일 형 준이 쓰다)

이 시를 지은 후인 3월에 동생 김율 장군은 송정리에서 일본 군인들에게 붙잡혀 광주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태원은 동생을 구하기 위한 작전을 짜다가 허리병이 도져서 치료차 임곡의 박산마을 뒤 어등산 자락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거미줄처럼 쳐놓은 일제 밀정에게 발각되어 1908년 4월25일 급습해 온 일본군의 집중 사격 속에 전사했다.
일제는 다음 날 감옥에 있던 아우 율을 데리고 와서 형의 시신을 확인시킨 뒤에
율마저 그 자리에서 총살해 버렸다. 태원의 나이 39세, 율의 나의 2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