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광주광역시 북구 풍향동 1-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겨레의 별이 되어
그리운 사람들은 가고 오지 않는데 해마다 꽃은 피어 저리토록 아파오는구나
어둠의 벽을 뛰어넘고 눈물의 바다를 건너
떨리는 속살을 어찌 다 감당할 수 있었던가
울분으로 칫솟던 산 한나 세워놓고 한숨으로 넘치던 강 하나 풀어놓고
아 우리 앞에 청청히 서 있는 깃발 우리 언제 그 처럼 뜨거웠던 적 있었던가
그리운 사람들은 가고 오지 않는데 해마다 꽃은 피어 저리토록 아파오는구나
어둠의 벽을 뛰어넘고 눈물의 바다를 건너
떨리는 속살을 어찌 다 감당할 수 있었던가
울분으로 칫솟던 산 한나 세워놓고 한숨으로 넘치던 강 하나 풀어놓고
아 우리 앞에 청청히 서 있는 깃발 우리 언제 그 처럼 뜨거웠던 적 있었던가
이제 멎었던 피가 감돌아 곳곳의 맺힌 고를 풀고 있다
막힌 역사의 뜨거운 한을 풀고있다
여기 가장 맑은 자리에 사람들이 와서 꽃등을 달고있구나
구겨진 가슴을 펴교 안쪽의 눈물을 닦으며 이 자리에 와서라
그대들의 넋과 높은 뜻을 별이 되어 길이 겨레의 앞길을 밝히리라
막힌 역사의 뜨거운 한을 풀고있다
여기 가장 맑은 자리에 사람들이 와서 꽃등을 달고있구나
구겨진 가슴을 펴교 안쪽의 눈물을 닦으며 이 자리에 와서라
그대들의 넋과 높은 뜻을 별이 되어 길이 겨레의 앞길을 밝히리라
일제강점기 학생독립운동은, 공주를 진원지로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산되었던 저항운동으로서 3.1운동과 함께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독립운동이었다. 이는 1929년 11월 3일 일본의 명치절에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합세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대대적으로 전개했던 항일시위운동에서 발발하였다. 이 운동은 전국으로 파급되어 곳곳에서 학생시위와 동맹휴학의 방식으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총 300여교 이상이 참가했고 학생수만으로도 당시 전체학생의 절반이 넘는 5만4천명이 참여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성진회와 독서회, 소녀회등 비밀결사 조직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주도된 운동이었다. 전남사범학교 학생들의 경우는,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했고 지역별 인재로 선발된 적은 학생수, 관비학생으로 졸업후 교직에 의무복무해야하는 등의 제약 조건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물론 비밀결사등을 통하여 조직적인 저항의 기치를 높였다. 재판기록등에 나타난 성진회 회원 13명은 졸업생으로 일선 현장에서 재직 중이었는데 이들은 강해석, 김기주, 김종선, 김태영, 김필재, 노근후, 박무길, 이동선, 임종대, 정귀석, 최상호, 하의철 등이다. 독서회 회원으로 재판에 회부된 25명의 재학생은 강달모, 강문범, 강유진, 곽찬신, 김동규, 김일제, 김재웅, 김종화, 남일남, 문영열, 박기순, 박노기, 박인배, 박중진, 박창하, 송동식, 신명철, 신류근 이경련, 이덕우, 이신형, 이영백, 이춘수, 홍귀주, 황상남등이다.
졸업생들은 재직 중에도 재학생들과 연대를 통해 긴밀히 활동하였으며, 재학생들도 당시 총 99명중에서 38명이 퇴학을 당하였고 이들 대부분은 옥고를 치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이래 추걱된 항일운동의 활화산으로서 전 민족의 호응을 받았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또한 1930년대 이후 우리의 독립정신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큰 원천이 되었으며 민족혼을 되살려 우리의 자존과 긍지를 되찾게 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성진회와 독서회, 소녀회등 비밀결사 조직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주도된 운동이었다. 전남사범학교 학생들의 경우는,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했고 지역별 인재로 선발된 적은 학생수, 관비학생으로 졸업후 교직에 의무복무해야하는 등의 제약 조건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물론 비밀결사등을 통하여 조직적인 저항의 기치를 높였다. 재판기록등에 나타난 성진회 회원 13명은 졸업생으로 일선 현장에서 재직 중이었는데 이들은 강해석, 김기주, 김종선, 김태영, 김필재, 노근후, 박무길, 이동선, 임종대, 정귀석, 최상호, 하의철 등이다. 독서회 회원으로 재판에 회부된 25명의 재학생은 강달모, 강문범, 강유진, 곽찬신, 김동규, 김일제, 김재웅, 김종화, 남일남, 문영열, 박기순, 박노기, 박인배, 박중진, 박창하, 송동식, 신명철, 신류근 이경련, 이덕우, 이신형, 이영백, 이춘수, 홍귀주, 황상남등이다.
졸업생들은 재직 중에도 재학생들과 연대를 통해 긴밀히 활동하였으며, 재학생들도 당시 총 99명중에서 38명이 퇴학을 당하였고 이들 대부분은 옥고를 치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이래 추걱된 항일운동의 활화산으로서 전 민족의 호응을 받았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또한 1930년대 이후 우리의 독립정신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큰 원천이 되었으며 민족혼을 되살려 우리의 자존과 긍지를 되찾게 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우리민족 말살정책과 조선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했고, 학생들의 투쟁의지는 더욱 비밀결사형태로 조직화하여 해방전까지 끊임없이 항거했다. 광주사범학교에서는 1941년 6월 1일 동맹휴학으로 권충원, 김두운, 김병옥, 김영국, 김용기, 박우태, 송진석, 유승복, 이순택, 정지영, 한흥섭등이 퇴학당하고 심한 고문을 받았다. 1943년 5월 광주고보 '무등회'사건을 계기로 제2차 학생독립운동이 발발했는데 광주사범학교에서도 1943년 비밀결사인 '무등독서회'가 결성되어 독서모임을 통한 정통역사관 정립, 항일사상 전파, 임정연락원의 밀명접수, 연합군 상륙시 행동대원으로의 봉기계획, 태극기 제작, 일제 패망과 조국해방 임박설 등 항일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이들은 1944년 10월에 발각되어 10개월 동안 온갖 고문을 당하여 피폐해진 상태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당을 맞게되었다. 죽음 직전에서 풀려난 '무등독서회' 회원 18명은 곽이섭, 김갑수, 김상중, 김용덕, 노동훈, 박현재, 안동영, 옥대호, 유창열, 이경채, 이석규, 정병광, 조규학, 천충식, 최정주, 허종철, 홍완표, 홍창기 등이다.
이와같이 정의감과 애국심이 강렬했던 학생들의 일제강점 압제하에서 떨쳐 일어나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고 분투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이 고난과 시련의 시기를 만났을 때마다 올바른 길잡이가 되어왔다. 이렇듯 또한 우리의 앞날을 밝혀 갈 등불이 될것이다.
선배들의 애국정신과 희생적 투쟁을 기리기위해 제1차 광주학생독립운동시기의 전남사범학교 학생의 역사적 사실과, 제2차 광주학생독립운동시기의 광주사범학교 '무등독서회' 사건을 기록하면서, 이 탑을 초등교원양성의 요람인 광주교육대학교, 무등산이 내려다 보고있는 이 풍향골에 세운다.
이는 앞으로 초등교단을 지켜갈 이 교정의 주인공들에게 선배들의 숭고한 자취를 알리고, 그 거룩한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 역사를 이 빗돌에 새겨 영구히 기리고자 하는 바이다.
이와같이 정의감과 애국심이 강렬했던 학생들의 일제강점 압제하에서 떨쳐 일어나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고 분투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이 고난과 시련의 시기를 만났을 때마다 올바른 길잡이가 되어왔다. 이렇듯 또한 우리의 앞날을 밝혀 갈 등불이 될것이다.
선배들의 애국정신과 희생적 투쟁을 기리기위해 제1차 광주학생독립운동시기의 전남사범학교 학생의 역사적 사실과, 제2차 광주학생독립운동시기의 광주사범학교 '무등독서회' 사건을 기록하면서, 이 탑을 초등교원양성의 요람인 광주교육대학교, 무등산이 내려다 보고있는 이 풍향골에 세운다.
이는 앞으로 초등교단을 지켜갈 이 교정의 주인공들에게 선배들의 숭고한 자취를 알리고, 그 거룩한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 역사를 이 빗돌에 새겨 영구히 기리고자 하는 바이다.
이 탑은 광주사범.사대.교육대학교 총동문회에서 주최하고, 우리 대학과 임현모 총장 그리고 광주사범 심상과 4회 졸업생 노동훈, 이경채 선배님등의 후원으로 2008년 3월 27일 건립되었다. 우리 대학 박정환 교수가 조형물을 기획하였고, 시와 글은 전원범 교수가, 탑명 글씨는 박영대 교수가 썼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역사가 머물던 이 자리에 피 묻은 시간의 발자국 일으켜 세우며 영혼의 잉걸불 하나 켜놓고 우리는 묵도의 눈을 감는다
그때 그 이야기는 너무도 많아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지만 우리가 지켜야할 조국 걸어야할 이 땅에 가장 뜨거운 이야기로 살아 있을 것이다.
이 나라 자손으로서 피 끓는 젊은이로서 겨레의 맥박이 되어 당당하게 소리치며 일어섰던 학도여
그때 그 이야기는 너무도 많아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지만 우리가 지켜야할 조국 걸어야할 이 땅에 가장 뜨거운 이야기로 살아 있을 것이다.
이 나라 자손으로서 피 끓는 젊은이로서 겨레의 맥박이 되어 당당하게 소리치며 일어섰던 학도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