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호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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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 산 16번지
탐방로그
광산이씨(光山李氏) 종중에서 이윤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애국지사광산이공윤호공적비(愛國志士光山李公允鎬功蹟碑)'는 1968년 세워졌으며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 산 16번지 한새봉농업생태공원 옆에 위치해 있다.
이윤호 선생의 집안은 아버지, 동생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신 분들이시다. 이윤호 선생의 아버지인 이주상(李周祥)도 전라남도 광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붙잡혀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윤호의 동생 이창호(李昌鎬)는 숭일학교 재학 중 광주 3.10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된 뒤 옥고를 치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립투사 광산이공 공표
경술국치는 민족천추에 잊지 못할 통분이요. 기미운동은 자손만세에 빛나는 의거로다. 일제 36년의 치정하에 우국애족의 일념으로 신명을 불고한 충의열사가 많았으나 일가에 3부자가 강개한 의지로 독립운동에 동참한 것은 진실로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다. 본 고을 일곡리에 살았던 고 광산 이공의 휘는 윤호인데 명문 고족이며 경창부군 휘 선재 호 필문공의 16세손이요. 기미의거에 광주의 주동인물로 수백명의 군중을 선두에서 지휘했던 휘 주상의 장남이다. 공이 고종 무술 1898년 8월 3일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재질이 청수하였고 자라서는 우월한 성적으로 광주 숭일학교를 졸업하여 학식이 밝았다. 1919년 3.1운동의 여파가 방방곡곡에 확산됨에 공은 약관의 나이로서 유계문 최경동 김금석 여러 동지 및 아우인 도호와 더불어 독립선언문을 각처에 배포하여 농민과 학생들을 선동하여 만세장소로 인솔하다가 체포령이 내림에 1년 이상을 피신하였으므로 권석판결로 7년을 언도받았고 그 후 다시 독립거사에 필요한 군자금을 한준호 정용탁 이준용 등과 함께 모금하던 중 왜경에 피체되어 징역 3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마친 뒤 후유증으로 1931년 7월 23일에 세상을 마쳤으니 나이 33세였다. 이 어찌 개탄스럽지 아니하랴. 비는 안동김씨요, 배는 강릉유씨인데 장은 승두 차는 승태 승은 계는 승휘이다. 손에 박휴인 휴찬 휴일 휴요. 증손은 병철 병오이다. 아! 공이여, 옛적 임진왜란에 위국진충하여 명전천추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만약 그때에 태어났으면 어찌 이에 이르지 못하였으리오. 비록 만시지감은 있으나 1986년 12월 관계법령의 규정으로 독립유공자의 표전을 받아 충혼을 달랬고 오늘날 빗돌에 공적을 새겨 뒷날에 알리노라.
1988년 무진 10월 5일 광산 김선일 삼가 지음
묘은 이장 우 대전유공자 묘역하고 비은 정축 9월 일에 이수 우 현지 필문공 18세손 기휴 근서
겨 뒷날에 알리노라.
1988년 무진 10월 5일 광산 김선일 삼가 지음
묘은 이장 우 대전유공자 묘역하고 비은 정축 9월 일에 이수 우 현지 필문공 18세손 기휴 근서
한새봉농업생태공원
愛國志士 光山李公 允鎬 功蹟碑(애국지사 광산이공 윤호 공적비)
愛國志士 光山李公 允鎬 功蹟碑(애국지사 광산이공 윤호 공적비)
독립투사 광산이공 공표
경술국치는 민족천추에 잊지 못할 통분이요. 기미운동은 자손만세에 빛나는 의거로다. 일제 36년의 치정하에 우국애족의 일념으로 신명을 불고한 충의열사가 많았으나 일가에 3부자가 강개한 의지로 독립운동에 동참한 것은 진실로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다. 본 고을 일곡리에 살았던 고
광산 이공의 휘는 윤호인데 명문 고족이며 경창부군 휘 선재 호 필문공의 16세손이요. 기미의거에 광주의 주동인물로 수백명의 군중을 선두에서 지휘했던 휘 주상의 장남이다. 공이 고종 무술 1898년 8월 3일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재질이 청수하였고 자라서는 우월한 성적으로 광주 숭일학교를 졸업하여 학식이 밝았다. 1919년 3.1운동의 여파가 방방곡곡에 확산됨에 공은 약관의 나이로서 유계문 최경동 김금석 여러 동지 및 아우인 도호와 더불어 독립선언문을 각처에 배포하여 농민과 학생들을 선동하여 만세장소로 인솔하다가 체포령이 내림에 1년 이상을 피신하였으므로 권석판결로 7년을 언도받았고 그 후 다시 독립거사에 필요한 군자금을 한준호 정용탁 이준용 등과 함께 모금하던 중 왜경에 피체되어 징역 3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마친 뒤 후유증으로 1931년 7월 23일에 세상을 마쳤으니 나이 33세였다. 이 어찌 개탄스럽지 아니하랴. 비는 안동김씨요, 배는 강릉유씨인데 장은 승두 차는 승태 승은 계는 승휘이다. 손에 박휴인 휴찬 휴일 휴요. 증손은 병철 병오이다. 아! 공이여, 옛적 임진왜란에 위국진충하여 명전천추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만약 그때에 태어났으면 어찌 이에 이르지 못하였으리오. 비록 만시지감은 있으나 1986년 12월 관계법령의 규정으로 독립유공자의 표전을 받아 충혼을 달랬고 오늘날 빗돌에 공적을 새겨 뒷날에 알리노라.
1988년 무진 10월 5일 광산 김선일 삼가 지음
묘은 이장 우 대전유공자 묘역하고 비은 정축 9월 일에 이수 우 현지 필문공 18세손 기휴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