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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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1013
탐방로그
광주백범기념관은 백 가구가 화목하게 살아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백화마을 학동 역사공원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1934년, 9년 만에 두 손자를 데리고 자싱으로 찾아오셨다. 당시 김구는 피신하는 몸이라, 어머니를 모실 수 없었다. 가정을 돌보지 못하였지만, 그런 아들에게 한 번도 탓을 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들이 잘못한다고 생각할 때 종아리를 때리셨다. 김구는 환갑이 될 무렵까지 어머니에게 종아리를 맞았다. 난징에서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청년단과 동지들이 돈을 모아 생일상을 차리려 하였다. 어머니는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시고, 도리어 돈을 보태어 권총을 사서 청년단에 하사하였다.
어머니는 임시정부와 함께 자싱·난징·창사·광저우·류저우 등지로 옮겨 다니며, 임시정부 가족들 사이에서 어른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인후염으로 1939년 4월 충칭에서 돌아가셨다.

김구가 일본인 쓰치다를 죽이고 인천감리서에 투옥되었을 때, 어머니는 부잣집 동자꾼으로 일하며 옥바라지를 하였다. 그때 어머니는 바가지에 밥을 얻어다 먹였다.
옳은 일하라며 자신을 따라 가시밭길을 걸었던 어머니를 평생 기억하기 위해 그 모습을 동상으로 제작하였지만, 끝내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동상은 1949년 8월 조각가 박승구가 완성하였다.
망명의 길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경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독립운동의 산물이다. 1919년 3월 1일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 임을 선언하노라."고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부정하고, 한국이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었다.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그 독립국으로 세운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가 결행된 후, 상하이를 떠나야 했다.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옮겼다. 일제는 현상금 60만 대양을 걸고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김구는 자싱으로 피신하였고, 한때 하이옌에 은신하기도 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제는 베이징에서 전쟁을 일으킨 이후 상하이 난징 등 중국대륙 각지로 점령지역을 넓혀갔다. 일본군의 점령지역이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는 피난을 다녀야 했다. 항저우에 있던 임시정부는 전장으로 이전하였다가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후, 다시 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 등지를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하였다.
남북협상
신탁통치를 막아내고 자주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문제도 중요하였지만, 국토와 민족의 분단을 막아내는 일도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미·소가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면서 국토는 분단되고 말았다. 여기에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면 민족마저 분단될 상황이었다.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미·소간에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서 신탁통치는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한국문제는 UN으로 넘어갔다. UN은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UN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UN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거절하면서 남한만의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김구는 남이 그어놓은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정시키고 각각 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국토와 민족이 분단될 뿐만 아니라, 남북의 형제자매가 서로 총칼로 대결하는 민족의 상잔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그리고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며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김구는 통일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자며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구는 충칭시기에 좌우연합정부를 실현한 경험이 있었다. 북측에서 이를 받아들였고,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북행길에 올랐다.
김구는 평양에서 남북의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남북한 모두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고 절규하였다. 회의를 통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결정서·공동성명서 등이 채택되었지만,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남쪽에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북쪽에서는 9월 9일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수립되었다. 이로써 국토와 민족은 분단되고 말았다.
백범마을 백화마을
삼남지방 순회
광주와 백화마을

1946년 보성을 떠난 김구가 도착한 곳은 광주였다. 대성초등학교에서 '김구선생환영기념강연회'가 열렸다. 당시 광주시장인 서민호씨가 환영 인사를 하면서 귀국동포전재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말하자, 김구는 그동안 여러 곳에서 성금으로 받은 선물 해산물·육산물·금품 등을 모두 전재민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기증했다. 당시 귀국동포 전재민들은 1920 ~30년대 광주천 정비사업으로 학동 8거리 일대에 조성된 갱생촌에 움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독립운동가인 서민호 광주시장은 김구의 회사금을 종잣돈 삼아 갱생촌 850평의 대지에 4~4.5평의 작은 건물 100여 가구를 세워 전재민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에 김구는 '백 가구가 화목하게 살아라.'는 의미로 '백화마을'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이 딸린 남루한 집이었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으며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있어 옆집에서 소곤대는 귀엣말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전재민촌이 한 지붕 아래 여섯 가구가 마치 마구간처럼 나란히 이어졌다며 '말집'이라 불렀다.
김구는 지방순시를 다닐 때마다 받은 돈과 물품을 그곳의 전재민을 위해 기탁했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던 전재민에 대한 김구의 관심과 애정은 각별했다.

1948년 광주 방문
김구가 광주를 다시 찾은 것은 1948년 10월 1일이었다. 당시 남북한은 서로 다른 체제의 정부를 수립한 직후였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김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남북의 갈등이 시작되던 때였다. 김구는 10월 1일 광주극장에서 열린 전남 '삼균주의청년단' 개소식에 참석해 분단과 남북한의 대립을 규탄하며 평화통일을 역설하였다.
오방 최흥종 목사
1946년 대성초등학교에서 열린 '김구선생환영기념강연회'에는 독립운동과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오방 최흥종 목사도 함께했다.
최흥종 목사는 1919년 3월 10일부터 13일까지 광주에서 전개된 3.1독립 운동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일생을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또 해방 직후 조직된 전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광주 YMCA의 창설을 주도하였다. 김구는 1948년 10월 1일 전남 '삼균주의청년단' 개소식에 참석한 후, 10월 3일 시간을 따로 내어 증심사 계곡의 오방정을 찾았다. 이때 김구는 최흥종 목사에게 '화광동진'이라는 휘호를 남겼다. 이후 서울로 돌아가 장문의 편지와 함께 또 다른 휘호 한 점을 보냈다. 김구는 그에게 두 점의 휘호를 남길 만큼 아끼는 마음이 간절했다.

知人者智 自知者明(지인자지 자지자명)
勝人者有力 自勝者强(승인자유력 자승자강)
知足者富 强行者有志(지족자부 강행자유지)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부실기소자구 사이불망자수)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총명한 사람이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이지만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넉넉함을 아는 사람이 부유한 사람이고 힘써 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는 사람이다.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은 그 지위를 오래 지속하고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은 영원토록 사는 것이다.
김구가 광주에 와서 최흥종 목사를 만나고 상경한 후 편지를 보내며 보낸 휘호(1948.10)
자료제공: 최협
광주·전남 출신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일강(一江) 김철(金澈) (1886.10.15~1934.6.29)
김철은 1886년 10월 15일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였다. 경성법률전수학교를 거쳐,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집안의 소작인들에게 농토를 나누어 주고 노비들을 풀어주었다. 고향에 은거하던 중 조선총독부의 협력해 달라는 회유와 협박을 뿌리치고, 1917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
1919년 잠시 귀국하여 3·1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천석군이었던 가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 의원과 임시정부 군무장·재무장·국무원 비서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 후 임시정부를 항저우로 옮기고, 그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로 인한 과로와 급성 폐렴으로 항저우 광자병원에서 49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으며, 송병조·양기탁·이시영·조완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애도 속에 항저우 악비묘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이곳은 아파트 단지로 변해 묘소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철을 기리기 위해 1975년 8월 전남 함평군 신광면 구봉산 기슭에 숭모비를 세웠고, 1984년 서거 50주기를 맞이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003년 6월에는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백강(白岡) 조경한(趙擎韓) (1900.7.13~1993.1.7)
백강 조경한
조경한은 1900년 7월 13일 전남 승주군 주암면(현재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 한동마을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단·배달청년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동북만주에서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자 참여하여 선전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31년 만보산사건이 일어나자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34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개설되자 교관에 임명되어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민족주의 진영의 정당·단체들이 연합해 결성한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회에 참가하였다.
1940년 5월 충칭에서 민족진영의 정당 단체를 연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데 기여하였다. 9월에는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총사령부 주계장에 임명되어 광복군의 살림을 맡았다.
1943년 3월 국무위원회 부비서장에 임명되었다가, 1944년 2월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3월 충칭 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 전당대회에서 중앙상무집행위원 겸 훈련부장에 지명되어 조직책임을 수행 하였다. 10월에는 국무원에서 국내 진입을 위해 국내공작위원회를 구성할 때 위원에 임명되었다.
조국 광복 후, 제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64년 9월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투쟁위원장을 맡는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993년 1월 7일 서울에서 타계하였다. 2009년에는 조경한 선생 현충시설 건립추진위원회에서 순천시 금당 공원에 기념비를 세워 고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광주백범기념관 건립경위

이곳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1013번지 일대는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후 연고없는 전재 귀국동포들이 집단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던 곳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은 해방 후, 1946년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애국계몽강연을 하였다. 광주 대성초등학교에서도 '김구 선생 환영 기념강연회'가 열렸는데, 당시 서민호 광주부윤(시장)으로부터 전재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들으시고 어려운 동포들의 거처마련을 당부하시며 각지에서 받은 현성금과 특산물 등을 쾌척하셨다. 이를 계기로 서민호부윤은 광주 유지들의 동참하에 100세대의 집을 짓고 김구 선생의 뜻에 따라 '백가구가 화목하게 살기 바란다.'뜻으로 '백화마을'이라 이름지었다.
2011년 토지주택공사에서 주거환경개선 사업으로 이곳에797가구의 새 아파트를 건립하였고, 광주광역시 동구청은 백범 김구 선생과 백화마을의 아름다운 인연을 기록하여 남기기 위하여 역사공원을 조성하였다.
한편으로 1998년 발족하여 백범 정신 선양사업에 열성을 다하고 있는 광주 전남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회가 2011년 사단법인 백범문화재단을 설립하여 2012년부터 광주백범기념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광주백범기념관 건립비로 2013년에 국비 6억2천1백원 2014년에 시비 2억4천2백만원이 확보되었고, 한 독지가의 뜨거운 애정과 지원으로 자부담금 3억7천9백만원이 마련되었다.
광주백범기념관은 2014년 11월 기공하여 총 건축비 12억4천2백만원 건평 288㎡ 규모로 2015년 5월 8일 준공된 바 그 경위를 밝힌다.
2015년 8월 1일
사단법인 백범문화재단 이사장 광주전남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 안종일
광주백범기념관
학동 역사공원
범례 - ① 공원 안내판 ② 팔거리 안내판 ③ 말집 쉼터 ④ 앉은벽 ⑤ 장식벽 ⑥ 백범 김구 선생 동상 ⑦ 광주백범기념관
백범 김구 선생과 백화마을
이곳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1013번지 일대는 일제 강점기 때 조국을 떠나 살다가 해방이 되어 귀국한 전재 동포들의 어려운 삶의 터전이었다.
해방 후 1946년, 백범 김구 선생은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애국계몽강연을 하였다. 광주 대성초등학교에서도 '김구 선생 환영 기념강연회'가 열렸는데, 당시 서민호 광주부윤(시장)이 귀국 동포 전재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말하자, 김구 선생은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받은 성금과 선물 등을 모두 마을 전재민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기증하였다.
광주에 전재민이 많다는 말을 듣고 시장을 초청하여, 다소간 전재민을 돕는 데 보태어 쓰라고 부탁하여 주고 광주 환영회를 마쳤다. - 백범일지 중에서 -
독립운동가인 서민호(徐珉壕) 광주부윤은 김구 선생이 희사금(喜捨金)과 광주 지역 유지들의 힘을 보태어 4~4.5평의 작은 건물 100세대의 집을 지어 전재민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김구 선생의 유지(遺旨)에 따라 '백 가구가 화목하게 살아라.'는 의미로 그곳의 이름을 '백화(百和)마을'이라 하였다.
한편 2011년 토지주택공사가 주거환경개선 사업으로 이곳에 797가구의 새 아파트를 건립하여 백화마을의 옛 모습은 사라지고 마을의 유래도 잊혀지게 되었다.
이에 광주광역시와 동구청에서는 김구 선생과 백화마을의 아름다운 인연을 기록하기 위하여 2011년에 역사공원을 조성하였고, 또 한편으론 백범 정신 선양사업에 열성을 다하고 있는 사단법인 백범문화재단이 2015년에 광주백범기념관을 건립하였다.
2015년 10월 26일
광주전남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사단법인 백범문화재단
광주백범기념관
백범 김구 선생
(1876. 8. 29 – 1949. 6. 26)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1876~1949. 74세)
1876(1세) 8월 29일(음력 7월 11일) 새벽 자시(子時)에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 빈농 집안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사이에서 태어남.
1887(12세) 사랑방을 서당으로 만들고 한학을 배움. 석 달 후 신 존위집 서당으로 옮겨 면학에 힘씀.
1894(19세) 팔봉 도소 접주가 되어 해주 죽산 장에서 선봉장으로 7백명의 총군을 거느리고 기병하여 해주성 습격,
1896(21세)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육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표고문 부착,
1897(22세) 해주 감옥에서 인천 감으로 이감. 심문을 받을 때마다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구를 죽였다'고 대답함.
1898(23세) 3월 9일 밤 탈옥하여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됨.
1908(33세) 안창호 등 애국지사 104명과 신민회 조직.
1911(36세) 안명근 사건으로 1월 5일에 체포됨. 징역 17년에 언도받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
1913(38세) 한일합방으로 일제의 국적에서 이탈하려는 의도로 옥중에서 이름의 구(龜)자를 구(九)로 바꾸고,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따서 호를 백범(白凡)이라 함.
1927(52세) 11월에 국무령에 취임하여 헌법을 개정, 위원제로 하여 임시 정부의 내각을 조직.
1928(53세) 민족 진영의 단결을 도모하여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한국 독립 당을 조직하고, 자서전 〈백범일지〉 상권을 쓰기 시작
1931(56세) 특수 비밀 결사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고 독립 루사 양성.
1932(57세)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주고 4월 29일 상해 홍구 공원에서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을 즉사케 하는 등 10여명을 살상.
1936(61세)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 국민당 조직.
1940(65세) 한국 독립당을 발족시키고 집행 위원장에 추대됨. 또한 임시 정부 주석으로 선출됨.
1945(70세) 27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옴.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5년간의 신탁 통치를 결정하자, 거족적인 반탁운동을 전개.
1947(72세) 남북 정당 사회 단체 협의회에 참석하여 완전자주 정부 수립 결의안을 지지함.
선생의 정치 이념을 표현한 〈나의 소원〉을 발표.
1949(74세) 6월 26일 낮 12시 36분에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저격을 받고 운명. 7월 5일에 전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
獨立萬歲(독립만세)
愼其獨(신기독)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가라
死於大義名分 生於民族正氣(사어대의명분 생어민족정기)
대의명분에 죽고 민족정기에 산다
不變應萬變(불변응만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온갖 변화를 감당한다
知難行易(지난행이)
아는 것은 어렵고 행동하기는 쉽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길이) 되리니
思無邪(사무사)
생각하는 바에 사사로움이 없는 것으로
곧 마음이 바람을 일컫는 말이다.

不患寡而患不均(불환과이환불균)
나라를 책임진 사람과 가정의 가장은
적게 가진 것보다 모두가 고르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心爲父母(심위부모)
마음으로 부모를 위한다

允執厥中(윤집궐중)
진실로 그 중심을 잡으라
공적비 석봉 최상준
회장님께서는 평소 당신의 소중한 자산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특히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도 열정적이셨습니다.
이곳 백화마을은 백범 김구 선생께서 동포애로써 보금자리를 마련하셨던 곳입니다. 역사적인 이곳에 작은 기념관을 세워 그분의 뜻을 기리고자 함에 있어 회장님께서 큰 도움을 주셔서 사업이 원만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모든 회원의 감사한 마음을 한데 모아 회장님의 깊은 듯을 찬양하고 기리고자 작은 돌에 정성을 새겨 드립니다.
2015년 5월 일
사단법인 백범문화재단 이사장 안종일
광주전남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 안종일
종합안내
① 안내 ②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③ 김구와 가족 ④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⑤ 대한민국 임시정부 ⑥ 해방과 통일운동 ⑦ 영상실 ⑧ 광주.전남 출신 독립운동가 ⑨ 백범 김구와 전라도 ⑩ 서거와 추모 ⑪ 체험존 ⑫ 포토존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에 바친 민족의 지도자 이며 겨레의 큰 스승이다.
선생은 황해도 해주에서 김순영과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다. 김자점의 역모로 선대는 황해도에 은거하였고, 이후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살았다. 신분차별을 깨닫고 상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과거시험을 준비하였지만, 부정과 비리가 만연한 현실 때문에 꿈을 접었다.
'양반 상놈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에 동학에 입도하여, 팔봉접주가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군을 일으켜 선봉장으로 활약하다가 안태훈의 집에서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유학을 배웠다. 평생 고능선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살았다.
일제의 침략을 받게 되자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의병에 가담하고,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맨주먹으로 처단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보복이었다. 인천감리서에 투옥되었다가 탈옥하여 전라도 등지로 피신하였고, 공주 마곡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환속 후 황해도에서 학교 설립·강연회 등 교육활동과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신민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안악사건. 105인사건' 등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월 1일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여 수립된 독립운동의 총 지도기관이다. 경무국장에 이어 내무총장·국무령, 그리고 행정 수반인 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상하이·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충칭에 정착하기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결행하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미국·영국 등 연합군과 함께 공동작전을 추진하였다. 장제스를 통해 카이로 회의에서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해방 후 환국하여 자주 독립국가 건설과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미·소 양군이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면서 국토와 민족이 분단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의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토와 민족의 분단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자주 독립국가 건설과 통일정부 수립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49년 6월 26일 반민족행위자들과 반통일 세력의 흉탄에 생을 마쳤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가계도
가족
김구는 외아들로 태어나 4번의 약혼과 파혼을 경험하고, 31살에 최준례와 결혼하였다. 딸 셋과 아들 둘을 두었으나, 세 딸은 어려서 죽었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한 후, 1920년 부인이 큰 아들 인을 데리고 왔다. 이어 어머니도 오셨고, 1922년 9월 둘째 아들 신이 태어났다. 단란한 가정이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부인이 둘째 아들을 낳고 계단에서 굴러 병을 얻었다. 병이 위급해지자 홍커우에 있는 폐병원에 입원시켰다. 부인이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지만, 김구는 가 볼 수 없었다. 홍커우는 일본인 거류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아들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어 어머니가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부인은 이미 영안실로 옮겨져 있었다.
환갑이 넘은 어머니가 어린 두 손자를 키웠다. 큰 아들은 밥을 먹을 나이였지만, 둘째는 어렸다. 어머니가 빈 젖을 물렸다. 굶지는 않을거라며 둘째를 고아원에 맡겼지만, 안타까워 어머니가 다시 데려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였다. 고향 사람들을 믿고 어머니와 두 아들을 황해도로 보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자랐다. 아들은 13살이 되어 어머니와 함께 중국에 다시 왔다. 그러나 함께 지낼 수 없었다. 어머니는 82살에 돌아가셨다.
큰 아들 인은 안중근의 조카인 안미생과 결혼하여 딸 효자를 낳았다. 큰 아들이 충칭에서 폐병에 걸렸다. 며느리가 폐병 치료약인 페니실린을 구해달라고 간청하였지만, 동지들이 폐병으로 죽어갈 때 약을 구해주지 못했다며, 며느리의 부탁을 받아주지 않았다. 1945년 3월 29일 결국 큰 아들은 죽었다. 나이 28살이었다. 둘째 아들 신도 비행사가 되라며 중국 공군에 보냈다. 당시 공군은 전투보다 훈련받다가 사고로 죽는 일이 더 많은 때였다.
치하포 사건. 1896년 2월. 황해도 치하포에서 수상한 일본인을 만났다. 분명 왜놈인데 한복을 입고 조선인 행세를 하였다. 흰 두루마기 사이로 칼도 보였다. 김구는 이 자가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 아닐까?", "미우라가 아니더라도 그 공범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놈을 죽여 국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 국가 치욕을 씻어보리라"고 마음먹었다. 왜놈을 처단하기로 하였지만 갈등이 없지 않았다. 섣불리 손을 썼다가 내가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능선 선생의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이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것이 장부로다(得樹攀枝無足奇 懸崖撒手丈夫兒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살수장부아)" 라는 가르침이 떠올랐다. 문기둥에 서있는 왜놈을 발길로 차서 계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쫒아가 그 놈의 목을 힘껏 밟았다. 왜놈이 칼을 잡았지만, 손목을 밟으니 칼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칼을 집어 왜놈을 처단하였다.
왜놈의 소지품을 보니, 일본군 육군중위 쓰치다란 자였다. 주막 주인에게 필기구를 가져오라 하여 "국모보수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였노라."라 쓰고, 그 밑에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밝혔다. 포고문을 붙여 놓오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행위를 숨기려하지 않았다. 3개월 후 관헌에게 체포되었고, 온갖 고문을 받았다.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집행 직전 고종의 명으로 중지되었다. 이후 탈옥하여 전라도 지역으로 몸을 숨겼다.

지금 소위 만국공법이니, 국제공법 어디에 국가간의 통화.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임금을 시해하라는 조문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살면 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 법정에서 일본순사 와타나베를 꾸짖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