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기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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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광주광역시 남구 행암동 9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獨立愛國志士 義兵將 貞齋 尹永淇 功績碑
(독립애국지사 의병장 정재 윤영기 공적비)
독립애국지사 정재공 윤영기 공적비
독립애국지사요 의병장 정재공 윤영기는 서기 1880년 6월 10일 광주광역시 남구 노내동 분적산하 효골에서 출생하였다. 함안 윤문가로 파평 시조 태사공 31세손 노초공 휘 석준과 광산김씨 사이에 장자로 태어나 장신에 귀골이 장대하고 대음성 이었다. 평소 정의와 신의를 앞세우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신망으로 행동하는 지도적 인물이었던 정재공의 의병활동을 보다 상세히 기술한다. 때는 한일합방으로 국운이 흔들린 즈음 정재공 윤영기는 1907년 1월 24일 의병에 참가하여 전라도 일대에서 송사 기우만 성재 기삼연 등과 함께 의거의 기치를 올렸던 녹천 고광순 의병진영의 참모로 입대하
였다. 의진에는 고광훈 고광수 고광채 박기덕 등이 참여하여 창평 저산 분암에서 창의의 기치를 올렸다. 4월 25일 능주사람의 협력을 받아 화순을 점령하고 일본 거주인의 가옥을 모두 불태워 관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다음날 동복으로 진군하는데 광주부에서 파견된 관군과 합동하여 도마치전투에서 격전 후 일시 후퇴하였다. 고광순 의진은 8월에 다시 신덕균 의진과 합세하여 창평 제 심리 중심으로 집합 연락하여 대규모의 거사를 계획하고 인봉 고제량의 창안으로 불원복의 글자를 새긴 군기를 사용하여 군사들을 격려하며 훈련시켰다. 9월 11일 천지신명께 제사를 드려 맹세한 다음 9월 12일 행군하여 동복땅을 지나 곡성군 일본인이 많기로 유명한 동복읍을 우선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14일 새벽 동복을 공격 적을 궤산시킨 후 다시 남원 곡성 등지를 지나며 격문을 각 곳으로 보내어 인심과 사기를 고무하였다. 9월 17일 지리산 화개동으로 들어가 군사를 훈련시키니 동복 순천 곡성 광양 구례 등지로부터 군사들의 참여가 점차 늘어 2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유진 훈련 중에 윤영기는 신덕균과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광주 진위대의 해산병들을 수습하여 많은 군사들을 얻어 돌아왔다. 그후 10월 17일 구례 연곡사를 본영으로 정하고 부세를 개편하였다. 고광수 고광채 고광덕 고광명 등 녹천 근친들은 유격과 호위를 담당하였고 신덕균은 참모. 윤영기는 호군에 임명되었다. 이때 광주의 일본수비대가 이들을 공격해왔다. 이 전투에서 의진은 분전하였으나 의병장 고광순은 전사하고 고광훈등이 체포되자 의진은 흩어졌다. 그러나 마침 군사 소모차 나가있던
였다. 의진에는 고광훈 고광수 고광채 박기덕 등이 참여하여 창평 저산 분암에서 창의의 기치를 올렸다. 4월 25일 능주사람의 협력을 받아 화순을 점령하고 일본 거주인의 가옥을 모두 불태워 관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다음날 동복으로 진군하는데 광주부에서 파견된 관군과 합동하여 도마치전투에서 격전 후 일시 후퇴하였다. 고광순 의진은 8월에 다시 신덕균 의진과 합세하여 창평 제 심리 중심으로 집합 연락하여 대규모의 거사를 계획하고 인봉 고제량의 창안으로 불원복의 글자를 새긴 군기를 사용하여 군사들을 격려하며 훈련시켰다. 9월 11일 천지신명께 제사를 드려 맹세한 다음 9월 12일 행군하여 동복땅을 지나 곡성군 일본인이 많기로 유명한 동복읍을 우선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14일 새벽 동복을 공격 적을 궤산시킨 후 다시 남원 곡성 등지를 지나며 격문을 각 곳으로 보내어 인심과 사기를 고무하였다. 9월 17일 지리산 화개동으로 들어가 군사를 훈련시키니 동복 순천 곡성 광양 구례 등지로부터 군사들의 참여가 점차 늘어 2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유진 훈련 중에 윤영기는 신덕균과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광주 진위대의 해산병들을 수습하여 많은 군사들을 얻어 돌아왔다. 그후 10월 17일 구례 연곡사를 본영으로 정하고 부세를 개편하였다. 고광수 고광채 고광덕 고광명 등 녹천 근친들은 유격과 호위를 담당하였고 신덕균은 참모. 윤영기는 호군에 임명되었다. 이때 광주의 일본수비대가 이들을 공격해왔다. 이 전투에서 의진은 분전하였으나 의병장 고광순은 전사하고 고광훈등이 체포되자 의진은 흩어졌다. 그러나 마침 군사 소모차 나가있던
신덕균과 윤영기는 난을 면하고 운봉 함양 순창 등지로 전전하였다. 1919년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선언문을 군중에게 살포하였으며 임정의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일경에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서 일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서기 2018년 10월 20일
공적비건립추진위원 영식 근식
함안윤씨 남촌공종회장 동림
공적비건립추진위원장 성림 근서
獨立愛國志士 貞齋公 尹永淇 行狀(독립애국지사 정재공 윤영기 행장)
본관: 함안, 호 정재, 시조 (태사공 尹華達(윤화달)) 32세 손, 중시조 (함안백 敦(돈)) 23세손, 남촌공 之和(지화) 15세손
생몰기간: 1880. 6. 10. ~ 1971. 1. 27 (91세)
출생지 : 광주광역시 남구 노대동
가족관계: 부 윤석준(尹錫峻), 모 광산 김근, 배 충주 박정월, 자 재림(在林), 자부 태인 허순자(許順子), 손 용설(容卨), 용익(容益), 정숙(貞淑) 증손 석현(釋賢), 재영(在英), 재진(在珍).
별세: 1971년 1월 27일 노환으로 별세
안장일시: 1971년 1월 30일 광복회장으로 선영하에 안장, 2011년 3월 30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 4-334 이장안장
의병활동: 1907년 1월 24일 을미 의병에 참가 고광순 참모로 임명
1907년 9월 17일 천여명의 군사를 훈련시켜 30여명 적을 섬멸
1907년 10월 17일 호군에 임명
1919년 상해임시정부 선언문을 군중에게 살포, 군자금 모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역에서 독립만세운동 주도
1920년 10월 독립자금 모금하다 일경에 체포 광주형무소에 1년간 옥고
1954년 광주향교 제3대 전교에 선임
1961년 3월 30일 파평·남원·함안윤씨 제4대 서강사종회장 선임
훈격: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獨立愛國志士 貞齋公 尹永淇 行狀(독립애국지사 정재공 윤영기 행장)
본관: 함안, 호 정재, 시조 (태사공 尹華達(윤화달)) 32세 손, 중시조 (함안백 敦(돈)) 23세손, 남촌공 之和(지화) 15세손
생몰기간: 1880. 6. 10. ~ 1971. 1. 27 (91세)
출생지 : 광주광역시 남구 노대동
가족관계: 부 윤석준(尹錫峻), 모 광산 김근, 배 충주 박정월, 자 재림(在林), 자부 태인 허순자(許順子), 손 용설(容卨), 용익(容益), 정숙(貞淑) 증손 석현(釋賢), 재영(在英), 재진(在珍).
별세: 1971년 1월 27일 노환으로 별세
안장일시: 1971년 1월 30일 광복회장으로 선영하에 안장, 2011년 3월 30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 4-334 이장안장
의병활동: 1907년 1월 24일 을미 의병에 참가 고광순 참모로 임명
1907년 9월 17일 천여명의 군사를 훈련시켜 30여명 적을 섬멸
1907년 10월 17일 호군에 임명
1919년 상해임시정부 선언문을 군중에게 살포, 군자금 모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역에서 독립만세운동 주도
1920년 10월 독립자금 모금하다 일경에 체포 광주형무소에 1년간 옥고
1954년 광주향교 제3대 전교에 선임
1961년 3월 30일 파평·남원·함안윤씨 제4대 서강사종회장 선임
훈격: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불원복(不遠復) 태극기(太極旗)
불원복 태극기(가로 128㎝, 세로 82㎝)는 일제강점기 구례. 곡성 일대에서 활동한 고광순, 윤영기 의병장이 일제 군경과 싸울 때 지리산 운영에 펄럭이게 한 "불원복(국권회복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이라고 쓴 태극기를 말한다.
"불원복" 태극기는 2008년 8월 12일 등록문화재 제394호로 지정되었다.

애창시 답설(踏雪)
서산대사시(西山大師 詩)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에는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今日我行蹟(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후세들에게 이정표가 될 것이니.
광유재(光裕齋) 중전기(重建記)

광유재는 광주광역시 남구 해동 9번지 와우산 남쪽에 중건하여 남촌공(南公村) 할아버지를 비롯한 25위를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곳이다. 우리 함안윤씨(咸安尹氏)의 시조는 휘 돈(敦)으로, 원시조이신 고려개국 벽상공신이신 태사공 휘 윤신달(尹莘達)의 10세(世) 손이시며.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장자계(長子系)이시다. 시조이신 휘 돈 할아버지께서는 당시 경상도 함안지방의 민란을 평정하신 공로로, 나라에서 함안백(咸安伯)으로 책봉되시어, 함안윤씨로 분간하게 되었다.
입향조(入鄕祖)이신 남촌공 할아버지께서는 휘 지화(之和)이시며, 함안부원군 휘 기견(起畎)의 손자요, 참판공 휘 구(溝)의 차남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조선 연산조 때 호조정랑으로 봉직하시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공께서는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되어 7년간 (1506년 9월 3일-1513년 11월 1일) 간난신고를 겪으신 후에야 귀양에서 풀리셨다. 그때 고향으로 가시지 않고, 광주 효골에 터전을 잡으신 후, 당시 명사이신 하천 고운(高雲, 의병장 고경명 장군 조부) 눌재 박상(朴祥), 조재 정만종(鄭萬鍾) 선생 등과 시(詩)와 도의(道義)로 교유하시다가, 1558년 2월 28일 향년 83세로 별세하시었다.
처음 광유재는 남촌공 할아버지 내외분을 비롯한 15위(位)의 제향을 받들기 위하여, 1948년에 후손들의 정성을 모아 현 위치 바로 아래쪽에 건립하였다. 그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이었으며, 60여년간 재실로 사용하여 오는 동안에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으나, 노후 되고 초라하여 후손들의 마음이 송구하기 그지없었다.
대마침 효골에, 빛고을 노인건강타운이 설치되면서, 화개재(華蓋齋)가 수용됨을 계기로, 2008년 3월 1일 종중 총회에서 종중재산으로 광유재를 중건(重建)할 것을 결의하여, 2008년 8월 19일 건축허가를 받아, 2009년 5월 29일 착공하여, 정성을 다한 끝에 2010년 6월 11일 역사적인 준공을 보았다.
중건된 광유재의 규모는 대지면적 1.296㎡(392평)에, 건축면적 242㎡(73평) [재각 124㎡ (37.4평), 삼문 18.2㎡(5.5평), 관리동 100㎡(30평)]으로, 건물 형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벌채한 홍송을 다듬어 둥근 기둥과 사각 기둥으로 썼으며, 대청 앞에 마루를 놓고, 문은 사창사리 빗살 합문으로 하였으며, 기와는 질 좋은 고령 통기와를 올렸다.
중건된 광유재는 조상님들의 돌보심과 후손들의 정성을 모아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 건립하였으니, 오고가는 후손들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길이 잘 보존해 나가야 할것이다.

2010년 6월 11일
함안윤씨 남촌공파 종중 근수

함안윤씨 남촌공파 500년 세거지
光孝門(광효문)
光裕齋(광유재)
광주 남구 행암동 9 구남마을 광유재 앞 독립애국지사 의병장 정재 윤영기 공적비를 찾았다.
獨立愛國志士 義兵將 貞齋 尹永淇 功績碑
(독립애국지사 의병장 정재 윤영기 공적비)
獨立愛國志士 義兵將 貞齋 尹永淇 功績碑
(독립애국지사 의병장 정재 윤영기 공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