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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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 216
탐방로그
전라도 광주 이장마을에 가면 장흥 고씨 집안에서 1592년 일어난 임란의병에서 1894년 2차 동학혁명으로 계승한 우리나라 의병 정신이 계승된 것을 볼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과 3부자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다 순절하였다.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1592년 금산 전투에서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 1561∼1592)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고경명의 첫째 아들인 고종후(高從厚, 1554∼1593)는 1593년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김천일·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했다.

한편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의병장의 후손 중에 선조의 의병 정신을 이어 구한말 독립 운동에 헌신하신 자손이 더 알려져 있어 기록해둔다.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은 전라남도 담양 출신으로 고경명의 둘째 아들인 학봉(鶴峰) 의열공(毅烈公) 고인후(高因厚)의 사손(祀孫)이다. 고광순은 1907년 의병장으로 전남 구례에서 구례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였고 동년 동복군에서 의병 백여명을 모아 왜적과 교전한 것과 지리산에서 광주수비대와 교전하다가 전사한 사실이 확인되어 1962년 독립장에 추서되셨다.

고광문(1864-1945)은 전라남도 담양 출신으로 호남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의 6촌 동생이다. 동학군으로 활동하였던 고광문(1860-1898)과 동명이인이자 같은 장흥 고씨 가문이다. 고광문은 이평국, 강사과 등과 함께 전남 곡성군에서 군사를 규합하고 물자를 조달하는 등의 사실이 확인되어 2002년에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아낌없이 주는 나무

지상에서 누구나 영원함이 있으랴
님도 낙엽귀근으로 홀연히 가셨지만
나눔과 봉사로 평생 베풀고
열성으로 인재를 키우고
정열로 문화를 가꿔온
삶의 가치 빛났기에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살아 있습니다

소박하고 온화한 정
넉넉한 말씀 들을 수 없지만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끝나지 않는 민중의 함성 소리
가슴으로 외쳐 펄럭이는 동학정신 다시 일깨워
우리들 마음 흔들고 있습니다

의지와 집념을 한데 모은 님이여
꿈과 이상을 항상 몸 움직여 땀 흘린 농부가 되어
가까이 미래를 두고자 한 님이여
역경을 삼면정신으로 이겨 낸 님이여
님은 우리들 마음속 빈자리 찬란한 빛깔로
가득 채워기를 흔들고 푸르른 하늘빛 묻어나도록
깃발을 올립니다
민중의 한과 서러움을 달래 줄 힘이 되소서
우리들 마음속에 동학정신 강물 되어
천세만세 영원히 흘러가게 하소서
영원히 흘러가게 하소서

시인, 문학박사 손광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지상에서 누구나 영원함이 있으랴
님도 낙엽귀근으로 홀연히 가셨지만
나눔과 봉사로 평생 베풀고
열성으로 인재를 키우고
정열로 문화를 가꿔온
삶의 가치 빛났기에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살아 있습니다

소박하고 온화한 정
넉넉한 말씀 들을 수 없지만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끝나지 않는 민중의 함성 소리
가슴으로 외쳐 펄럭이는 동학정신 다시 일깨워
우리들 마음 흔들고 있습니다

의지와 집념을 한데 모은 님이여
꿈과 이상을 항상 몸 움직여 땀 흘린 농부가 되어
가까이 미래를 두고자 한 님이여
역경을 삼면정신으로 이겨 낸 님이여
님은 우리들 마음속 빈자리 찬란한 빛깔로
가득 채워기를 흔들고 푸르른 하늘빛 묻어나도록
깃발을 올립니다
민중의 한과 서러움을 달래 줄 힘이 되소서
우리들 마음속에 동학정신 강물 되어
천세만세 영원히 흘러가게 하소서
영원히 흘러가게 하소서

시인, 문학박사 손광은
삼면(三勉) 고영두(高永斗)

1930년 10월 27일 전남 광산군 대촌면 이장리에서 임진왜란 의병장 충렬공 제봉 고경명 선생의 16세손으로 태어났다. 증조부 고광문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의 접주로 전 재산을 헌납하며 앞장섰지만, 혁명 실패 후 타향에서 비참이 별세하였고, 대대로 부농이었던 집안은 가난한 소작농으로 몰락했다. 빈농의 아들로 학비가 없어 소학교 졸업 후 진학을 못하고, 17세부터 주물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1948년 양림동에서 가구 장식을 생산하는 사업을 시작으로, 1954년 광주장식공업사, 1960년 오복스텐레스를 창업했으며, 1973년 삼면스텐레스공업(주)를 설립하여 스푼, 포크, 나이프 등의 스텐레스 양식기를 해외 30여 개국으로 수출하여 1990년 1천만 달러 수출을 달성해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는 영광을 차지했다. '자조·자립·자성'의 삼면정신을 몸소 실천하여 기업인으로 성공한 뒤 국가의 지역경제 인재육성, 문화발전 등 다방면에 기여하였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부회장,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고문을 역임하며 동학농민혁명의 명예회복에 이바지하였고, 증조부 고광문.광인.광룡 삼형제의 자료를 수집하여 유공자로 인정받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고향에 증조부 삼형제를 기리는 추모비 건립을 준비하다 2006년 2월 23일 타계하였고, 그 뜻이 이어져 이 자리에 기념공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2016. 6. 3
광주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추진위 상임대표 박선홍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대표 이상식
東學農民革命紀念碑(동학농민혁명기념비)
동학농민혁명기념비
東學 呪文(동학 주문)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人乃天(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인내천)
사람은 곧 하늘이니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이것이 동학(東學)의 인내천(人乃天) 교리이다.
동학을 세우시고 이끄신 최제우(崔濟遇), 최시형(崔時亨) 선생은 양반이나 상민, 노비나 천민의 차별이없고 적자와 서자, 처, 첩의 구별이 없으며, 농군이나 장인(匠人)이나 상인이 다 같은 사람이요 만민이 평등함을 가르치셨다. 동학의 종교적 교화에 온 나라의 양식있는 양반과 백성이 이 가르침을 따르니 새로운 이상 국가를 갈망하는 동학교세가 전국에 퍼져나갔다.
輔國安民(보국안민) 나라를 도와서 백성이 편안하게
布德天下(포덕천하) 한울님 진리가 온 천하에 베풀어져
廣濟蒼生(광제창생) 도탄 속에 백성을 넓게 구제하니
地上天國(지상천국) 세상사람 살기좋은 천국이로다
東學 三兄弟記(동학 삼형제기)
東徒 高光文(1860~1898) 字 應三 / 동도 고광문(1860~1898) 자 응삼
接主 高光寅(1862~1936) 字 應善 / 접주 고광인(1862~1936) 자 응선
東徒 高光龍(1867~1938) 字 應五 / 동도 고광룡(1867~1938) 자 응오
충렬공 제봉의 넷째 해사공 후손 마을인 이곳에서 차증손 하빈공 8대 종가집 아들로 위 3형제분 태어나실때는 웃대부터 물려받는 부농 집안에서 학문에 전념과 가사근면하셨으나 동학에 입교하여 갑오(1894) 동학혁명에 동참하시면서, 그많은 전답을 동학군자에 헌납하고 목숨 걸고 싸우셨으나 관군이 함께한 일본군의 신무기 앞에 죽창으로 맞싸운 동학군 원통하게 패전하고, 끝내 타향객지로 피신 전전하게 되셨으니, 그 억울한 통탄 비분의 세월을 한없이 보내셨을 것으로 짐작되는 분들이, 비단 이 3형제 뿐이리요만 당시는 동학인을 역적으로 잡히면 처형되는 세상이라 모든 집안이 숨기고 감추어서 110년 후인 오늘날에 아는 이가 거의없어 안타까울 뿐이며 이를 잊지 않기 위하여 이 돌을 세웁니다.
2004.10. 응삼 증손 영두 근수
동학농민혁명 약사
조선 왕조 말기인 1890년 대에 들어서면서 벼슬 자리를 돈으로 사고파는 부패한 벼슬아치들의 혹심한 학정과 이들을 등에 업는 악덕 양반 지주들의 과중한 소작료 착취와 장리벼의 고리 수탈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억눌리고 헐벗고 굶주림에 허뎍였다. 배우지 못하고 가난과 무식의 대물림이 되풀이 되는 암담한 세상에서 백성은 한탄과 원망으로 세월을 보내며 새로운 세상이 오기만을 갈망하고 있었다. 마침내 억눌린 백성들의 분노가 충천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접주 전봉준을 대장으로, 손화중, 김계남을 부대장으로 죽창과 몽둥이를 든 농민군이 고부 관아에 처들어가서 악덕 군수를 몰아내니 억눌리며 숨죽이고 살던 백성들이 동학군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그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동학농민군은 단걸음에 전주감영을 접수하고 전라도 여러 고을에 집강소(執綱所)를 열어 광제창생(廣濟蒼生)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개혁정치를 펼쳐나갔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에 이르러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 앞에 맨몸으로 맞서다가 처절한 항쟁 끝에 끝내 패하니, 오호라 하늘이 무심하구나. 전봉준 대장은 순창에서 잡혀가 처형되고, 수많은 동학군이 남으로 밀리다가 장흥 석대뜰 전투를 긑으로 흩어지니 아아 참으로 절통하고 허망하도다. 그러나 백성들이 흘린 피는 헛되지 않았다. 조정은 갑오경장의 개혁을 단행하였고, 동학에 몸 담았던 손병희 선생이나 백범 김구 선생은 동학사상의 맥을 이어 독립운동의 선봉이 되었으며 조국 광복을 이룩하였다. 이에 만민평등과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국가의 영광은, 실로 110년 전인 동학농민혁명 정신과 선열의 고귀한 흘린 피의 위업이 아닐 수 없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어서바삐 날아가라 댓잎솔잎 푸르다고
봄철인줄 알지마라 백설이 휘날리면
먹을것이 바이없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四大綱領(4대강령)
一曰(1왈) 不殺人(불살인) 不殺物(불살물) 사람이나 생물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二曰(2왈) 忠孝叢全(충효총전) 濟世安民(제세안민) 충과 효를 다 같이 하여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
三曰(3왈) 逐滅洋倭(축멸양왜) 澄淸聖道(징청성도) 왜와 서양 오랑캐를 죽멸하여 우리 도를 드높인다.
四曰(4왈) 驅兵入京(구병입경) 滅盡權貪(멸진권탐) 군대를 몰고 한양에 들어가 권신과 귀족을 모두 없앤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오랫동안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농민들이 봉건왕조의 수탈구조와 외국의 침략에 맞서, 반봉건 반외세를 기치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봉기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그리고 최대 규모의 근대혁명이다. 당시 호남은 물론 전국에서 수백만이 참여한 농민군은 수십만의 희생자를 내면서 1년 여 동안 처절하게 투쟁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와 민족보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위정자들과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일본군의 신무기 때문에 좌절당했다. 동학농민혁명은 비록 당시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정신은 끊임없이 계승 발전되어 이후의 우리 역사를 주도하는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한말 의병항쟁과 일제 강점기의 항일독립운동 등 자주독립투쟁은 물론 해방 이후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반분단의 통일 운동이 그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 진실이다. 한국 근대사의 서막을 연 동학농민혁명이 역사 발전을 이끌어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이룩한 것이다. 처음부터 열성적으로 참여한 광주,전남의 농민대중은 장흥을 비롯한 전남의 남단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희생됐고, 바다 건너 도서 지방으로 옮겨서 의병 활동과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 침략자들은 혁명의 지도자들과 참여자들, 그리고 농민들을 철저하게 박해하고 탄압해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을 뿌리까지 뽑으려 했다. 그러나 위대한 우리 민족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바탕으로 해방과 독립을 쟁취했고, 해방 이후에도 분단 극복과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우리 국민은 특히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점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명예 회복운동을 줄기차게 추진 2004년 2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이끌었다. 구천을 맴돌던 참여자들의 넋이 구국의 선각자로 추앙받게 되었고, 숨어 살았던 후손들도 반란군의 자손이라는 잘못된 평가에서 벗어나 자랑스러운 애국자의 후에라는 긍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시점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이 땅에 세우고자 온몸을 바치신 선열들의 혁명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헌신하는 것과 자랑스럽고 훌륭한 통일조국 건설에 이바지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2014년 5월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이사장 김대곤
광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단 – 광주광역시 남구

김행순 강봉희 강영희 고광룡 고광문 고광인 곽윤중 김덕구 김복환 김재관 김종태 노병철 문달현 문재웅 문흥채 박병옥 박용운 손계환 손동채 손상옥 오권선 유재희 윤주은 윤태한 이겸호 이춘영 이몽근 이병기 이성호 이수갑 이응범 이의호 이인숙 이행원 장옥삼 장경삼 장공삼 전창주 정평서 정필선 조승현 조영운 채봉학 채호석 최성칠 최윤주 최장현 최평집 한승철 허상호 홍현철
동학농민군 지도자 고광문,광인,광룡 삼형제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농민대중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쟁취하려다 일본군의 신무기에 좌절당하고 말았다. 호남인이 앞장서고 수백만이 참여하여 수십만의 희생자를 내었고 참여자들은 살상당하거나 재산을 잃고 타향살이로 전전하면서 분노와 고통으로 살았고 후손들은 숨을 죽이고 불안하게 나날을 보냈다.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유린되었을 때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나라와 민족을 구출한 제봉 고경명 선생의 13세손인 고광문,광인,광룡 삼형제는 인근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다 혁명이 실패하자 고향을 등지고 은신하여 한과 굶주림으로 연명하였다.
동학농민혁명정신은 계승.발전되어 한말의 의병항쟁.일제시대의 처절한 독립투쟁 그리고 해방 이후의 분단과 독재에 맞서 통일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원동력으로 역사 발전을 주도했다. 그리하여 2004년 2월에 동학란이 동학농민혁명으로 명예 회복되어 구천을 맴돌던 주인공들은 나라를 이끈 선각자들로 추앙받게 되었다.
우리는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바쳐 조국의 역사를 발전시키려던 동학농민군 지도자 삼형제와 같이 참여했던 주민들의 공을 새겨 역사의 본보기로 삼고자 이곳에 기념공원을 조성하여 길이길이 기념하고자 한다.
2014년 5월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전 이사장 서원대 석좌교수.명예문학박사 이이화 지음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 유공자 고영두 선생
자조.자립.자성에 힘쓰며 살았던 삼면(三勉) 고영두 선생은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짓밟혔을 때 나라와 민족을 구출한 고경명 의병장의 16세손이며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쟁취하려던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 지도자인 고광문의 증손으로 1930년 10월 27일에 이곳에서 출생했다. 삼면은 근면과 검소를 실천하면서 16세에 공장 종업원으로 시작하여 기업인이며 농사꾼으로 성공하여 베풂과 나눔에 솔선수범하였다. 특히 평등세상을 만들려던 동학농민혁명에 앞장서신 증조부인 고광문.광인.광룡 삼형제 분의 뜻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동학농민혁명 유족회와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의 고문으로 열성적인 활동을 하여 2004년 2월에 동학란이 동학농민혁명으로 명예 회복되어 혁명에 참여했던 분들이 나라를 이끈 선각자들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게 하였다. 선생이 2006년 2월 23일에 홀연히 별세하자 아내인 정영숙 여사의 깊은 뜻과 아들인 고병삼 박사의 효성으로 이 공원 자리를 마련해주어 삼면의 정신을 빛내고 역사의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의 정성을 모으고 뜻을 합하여 충성과 정의를 기리고 기념할 수 있게 한 것은 삼면의 투철한 동학농민혁명정신 이해와 유덕이 뛰어났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014년 5월 광주.전남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대표 전남대학교 명예교수.문학박사 이상식 지음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 216 광주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을 찾아가고 있다.
이장마을(泥場洞)과 동학농민혁명
이장마을(泥場洞)과 동학농민혁명
1894년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는데 고광문.광룡.광안 3형제는 이장마을과 주변의 농민들을 이끌고 혁명대열에 앞장섰다. 고광문의 증손인 고영두는 동학농민혁명 유족회와 광주.전남동학농민혁명사업회의 고문으로 혁명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데 공헌해 혁명의 명예회복을 이룩했다.
□ 동학농민혁명의 정의
1894년 3월에 봉건체제의 개혁을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 투쟁을 전개한 농민중심의 혁명.
□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
1894년 1년간 전개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이었으며, 1892년에서 1893년까지 동학교단의 조직적인 교조신원운동과 1894년 1월 고부 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3월 전라도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시작되었다. 피지배 계층의 사상적 견해를 반영하고 있던 동학사상과 전국적 조직이던 동학교단을 매개로 광범위한 농민 대중이 참여하였는 바, 개화파가 주도했던 갑신정변이나 독립현회운동, 재야유생이 주도했던 위정척사운동이나 의병 항쟁 등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나, 동학농민혁명은 피지배 게층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항쟁이었다.
종래 군.현 단위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던 항쟁을 전국 차원의 항쟁으로, 일시적 투쟁에 장기 지속적인 항쟁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조선 후기 빈발했던 농민봉기 단계에서 나타났던 민중의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의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대규모 농민 대중에 의한 혁명이었다.
일본의 침략 야욕과 부패.무능한 조선왕조 봉건 지배층의 외세 의존 및 보수 유생의 체제 수호의 벽에 좌절하였으나, 1894년 이후 전개된 의병 항쟁, 3.1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회개혁 운동과 자주적 국권 수호운동으로서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민중 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으나,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변화시키고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을미의병 활동, 3.1운동, 4.19혁명, 5.18광주 민주화 운동의 모태로서 오늘날 평등사상과 자유민주화의 지평을 연 근대 민족사의 대사건이었다.
□ 광주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조성배경
한국근대사의 서막이요 이후 민족운동과 민주운동의 원동력으로 우리나라 역사발전을 주도했고, 호남인이 앞장서서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봉기했던 동학농민혁명을 기리고자 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특히, 이 지역 출신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고씨 삼형제(고광문, 고광룡, 고광인)의 후손이 토지를 기부하고, 2014년도에 광주의 원로들이 광주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추진위원회를 구성 국비를 지원받아 기념공원을 조성하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