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언덕(광주 3.1운동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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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50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광주 남구 양림동 506 휴먼시아아파트2단지 어린이놀이터 3.1운동발상지 남궁혁 가옥 터, 민족대표33인 묵비석은 양림교회 바로 옆에 있었다.
3.1만세운동 발상지
3.1만세운동 발상지
1919년 동경의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김마리아가 2.8독립선언서를 숨겨 부산,대구 등을 거쳐 광주의 언니 김함라 선생(남궁혁 장로의 부인,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 집으로 가져왔고 독립선언에 관해 알렸다. 광주의 3.1만세운동은 최흥종이 서울에서 체포되자 김철을 중심으로 남궁혁의 집에서 교인들과 비밀 독서모임 회원들이 모여 거사를 계획하고 역할을 분담하였다. 3월 10일 광주천 작은 장터를 휩쓴 만세물결은 본정을 거쳐 법원 앞을 지나 경찰서 앞까지 진행하였다. 수피아 여학생 윤형숙의 한쪽 팔이 일본도에 잘려나가는 등 유혈진압 끝에 100여명이 체포되고 교회당은 몰수되었다. 그러나 만세운동 후 광주에서는 이념을 초월한 전면적인 사회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그 역량은 1929년의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기억의 언덕 - 광주 3.1운동 발상지
광주에서의 3.1운동은 광주 출신으로 동경 메이지대학에 유학중이던 정광호가 최팔용 등 11인이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발표된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서울에서 유학중이던 광주출신 김범수 등과 만나 광주에서 내려오면서 부터였다. 2월 말 서울에서 광주의 3.1운동을 논의하기 위해 김필수 목사가 내려와 최흥종과 김복현(김철)을 만났고, 이후 두 사람은 3월 2일 상경하여 유학생들을 만나 광주 3.1운동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후 책임자가 되었지만, 3월 5일 최흥종은 유인물을 나눠주고 깃발을 흔들며 만세시위를 선동하다 체포된다. 최흥종의 체포를 확인한 김복현은 3월 6일 손병희 외 32인이 서명한 3.1독립선언서 등 5종류의 문건을 지참하고 광주로 내려온 후 당일 저녁 남궁혁의 집에서 광주 3.1만세시위를 모의한다. 이때 참석한 인물은 김복현.김강.최병준.송흥진.최정두.한길상.김용구.김태열.강석봉.손익식 등 양림동 기독교계인사와 신문잡지종람소 회원, 숭일학교 교사 등 10명이었다. 3월 8일 큰 장날을 기해 만세를 부르려던 계획은 독립선언서 등 준비 소홀로 3월 10일 작은 장날로 연기된다. 10일 오후 3시 30분, 광주교 밑 모래사장에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들자, 김복현은 시위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운동의 개시를 선언한다. 이어 시위 군중들은 모래밭에서 언덕으로 올라와 작은 시장으로 출발, 양림리 방면에서 달려 온 숭일학교 학생 100여명과 수피아학교 여학생 30여 명, 작은 시장에 모인 시민 수 백명과 합쳐져 독립만세 기와 구한국 국기를 휘날렸고, 기를 손에 들지 않은 모자를 흔들고 혹은 양손을 들고 수시로 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 때 수피아여학교 윤형숙은 일본 헌병이 내리친 칼에 왼팔이 잘리는 등 경찰서 앞마당은 피로 벌겋게 물들게 된다. 시위에 참가하였던 제중원 회계직원이던 황성호는 독립의식을 높이고 다음 거사를 위해 윤익선 명의로 발행되었던 「조선독립신문」을 모방하여 「조선독립광주신문」 1~3호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광주천 광주교에서 시작된 광주 3.1만세운동의 정신은 해방 이후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를 쟁취하는 광주인들의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다. 〈노성태 「광주의 기억을 걷다」중에서〉
현재 휴먼시아 아파트로 인해 사라진 남궁혁의 집터가 있던 곳으로 광주 3.1운동을 처음 모의한 곳을 기억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2019. 5. 남구청
각 돌마다 33민족대표의 생-몰 지역 이름이 새겨져 있다.
1872 - 1951 평남 성천 나인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