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길(아리랑고개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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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290
탐방로그
이 벽화는 2020년 초까지만 해도 테마공간 안쪽에 있었는데 현재는 인도 쪽으로 옮겨졌다.

3.1만세운동길을 더 자세히 보고 싶다면 이강하 미술관 앞에 만들어진 상징 게이트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3·1만세운동의 숫자 3을 눕힌 물결 모양과 기둥은 숫자 1을 상징하는 조형물 위로 태극문양이 제작되어있다. 게이트의 기둥에는 광주 3.1운동에 앞장 섰던 오방 최흥종, 윤형숙 선생, 박애순 선생의 사진이 걸려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광주양림교회. 양림교회라는 같은 이름이 많다.
3.1만세운동길 '아리랑고개'
수피아여학교에 시작된 3.1만세운동은 오웬기념각을 거쳐 양림윗교회를 향하던 중, 이곳 작은 언덕길에 태극기를 흔들며 '아리랑'을 부른다. 그날 이후 이곳이 '아리랑고개'로 불렸다. 3.1운동은 남궁혁 가옥 터에서 비밀리에 계획됐으며, 그 일로 100여 명이 체포되고 교회당이 몰수 당했다. 2009년 휴먼시아가 들어서면서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의 묵비석 공원을 설치했다. 지금은 3.1만세운동길로 명명돼 있다. 민족대표 33인의 묵비석(남궁혁 가옥 터)
여학생들의 치마에 그려진 태극기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은 독립선언서를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학생들은 수피아홀에서 비밀리에 치마를 뜯어 태극기를 제작, 3월 10일 수피아 전교생이 숭일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이끌며 경찰서까지 행진했다. 그 날의 거사로 수피아 교사와 학생 23명이 옥고를 치렀다.
광주 3.1만세운동
1919년 2월 도쿄 2.8독립선언에 참여한 김마리아 여사(수피아 교사 지냄)가 감시를 뚫고 부산,대구 등을 거쳐 양림리의 언니 김함라 선생(남궁혁 장로 부인)에 독립 선언서를 전달했다. 광주의 만세운동은 김철을 중심으로 남궁혁 가옥에서 교인들과 비밀 독서 모임 회원들이 모여 거사를 계획했다.
3월 10일 만세물결은 광주 작은 장터를 휩쓸고 서문통과 법원 앞을 지나 경찰서까지 이른다. 1920년대에는 최흥종 등이 주도하는 광주만의 다채로운 사회운동으로 승화되고, 1929년 광주 학새 독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가 윤형숙 열사
윤형숙(윤혈여 1990.9.3. - 1950.9.28.)
전남 여천군 화양면에서 3남 2녀의 장녀로 태어나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에 다니던 1919년 3월 10일 독립선언서 등을 나눠주며 작은 장터(부동교 밑)를 거쳐 경찰서까지 행진하며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과정에서 일본 헌병대의 군도에 왼팔이 잘리는 참변을 당했으나, 오른손으로 태극기를 다시 집어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 체포됐다. 일본경찰의 취조를 받을 때 이름을 '윤혈여(尹血女)'라고 했다. 징역 4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출옥 후 전도사, 유치원교사로 봉사하며 청년의 문명퇴치와 항일의식 함양에 앞장섰다. '외팔이 여선생님' '제2의 유관순'으로 불렸다. 1950년 9월 28일 미평과수원(현 여수 둔덕동 정수장터 입구)에서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북한군에 의해 피살됐다. 2014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광주 남구 양림동 290 광주양림교회 앞 3.1만세운동길 아리랑고개 벽화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