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림동 역사인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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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228-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우월순
어린이들을 사랑한 우월순 제중병원장은 1908년 장애아와 고아들을 위한 지역 최초의 고아원사역을 시작하였고, 서로득과 함께 어린이 주일학교를 부흥시켰다. 1909년 한센병자들을 보살피다 봉선리에 나병원을 설립, 최흥종, 서서평과 돌보다가 환자들의 쇄도로 총독부의 이전 지시에 따라 멀리 여천지역으로 이전, 애양원을 설립, 평생 병자를 가족처럼 보살폈다.
1910년 전후 그가 지은 아름다운 회색벽돌 기와집이 안식년으로 미국에 있던 1922~23년경 불이나 후에 다시 건축되어 한동안 제중병원장 사택이 되었다.
오기원
오기원의 희생적인 삶과 순교는 우리나라 한센병 구제역사에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오기원기념각을 광주 전남 지역의 기독교 영성에 영향을 준 성경학교는 물론, 문화예술회관, 교육시설 등으로 활용되어 광주 신문화의 전당이 되었으며 1919년에는 광주YMCA가 창립되는 등 근대 시민운동의 산실이기도 하다.
楊林(양림) 역사 인물거리
오방 최흥종 기념관 맞은편 '양림 역사인물거리'에 많은 사람들의 안내판이 붙어있다.
楊林(양림) 역사 인물거리
정율성
전남 광주(光州) 양림정에서 태어났고 초명은 부은이다. 광주 숭일 보통학교를 마치고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각 난징[南京]·상하이[上海] 등지를 전전하는 동안 크리누아에게 작곡과 성악을 배웠다. 1937년 옌안[延安]의 루신[魯迅]예술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1939년 중국공산당에 입당, 〈옌안송〉〈팔로군대합창〉 등을 작곡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 〈팔로군대합창〉 중의 〈팔로군 행진곡〉은 1949년 중국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가〉로 불려오다가 1988년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정식 군가로 비준을 받았다. 한때 문화대혁명에 협력하지 않은 죄로 시련을 겪었으니 다시 작곡활동을 개시하여 가곡·가극·영화음악 분야 등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조아라
소심당(素心堂) 조아라는 1927년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하여 학생독립운동 비밀결사에 참여해 옥고를 치뤘다. 졸업 후 교사로 재직하였다. 김필례와 함께 광주 YWCA와 인연을 맺고 본격적인 항일운동 및 여성 계몽운동을 펼쳤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인회를 출범시켰다. 광복 이후 광주YWCA의 회장을 역임하고 광주 어머니회, 걸스카웃, 광주 여성단체 협의회 등을 육성 발전시켜 여성의 계몽과 권익을 위해 35여년간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힘써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모로 불리게 된다.
최흥종
독립운동과 농촌계몽운동, 빈민운동 등에 힘쓴 목사. 호는 오방(五放)이다. 1880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젊은 시절에는 악명높은 폭력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04년 미국인 선교사들의 희생정신을 체험한 뒤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는 나병 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1909년 제중원에서 나병환자를 치료하는 조수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1911년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광주 봉선동의 땅 1000평을 무상으로 기증해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설인 광주나병원을 설립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1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난 뒤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목사 자격을 얻었고, 1920년 YMCA를 창설하였다. 1932년 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하고, 1933년 500여명의 나병 환자들을 이끌고 광주에서 경성의 조선총독부까지 '구라(救癩)' 행진을 벌려 일본 총독으로부터 소록도 재활시설 확장에 대한 확답을 받아냈다. 1947년 한국나병예방협회를 창립하였으며, 심애학원(1948)·호혜원(1956)·송동원(1958) 등을 설립하였다.
그의 호인 오방(五放)은 '가사에 방만, 사회에 방일, 정치에 방기, 경제에 방종, 종교에 방랑' 등 5가지 해방을 뜻하는데, 그는 이 뜻대로 가족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받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경제적으로 속박 받지않으며, 종파를 초월하여 정한 곳 없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5가지 신조를 평생지키며 살았다. 민족운동가이자 사회·노동운동가이며, 빈민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배동신
배동신은 17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한 뒤, 1943년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입상하였다. 같은 해 자유미술가협회 정회원이 된 뒤,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해 1947년 광주도서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1986년까지 26회에 걸쳐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한국에서는 갤러리 그룹전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78년부터는 서울로 올라와 활동하다가 1989년부터 지금까지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현대미술 초대전, 원로작가 초대전 등 각종 초대전에 출품하였고 1998년 10월 광주광주시에서 배동신 수채화 60년전 초대전을 열었다.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줄곧 수채화에만 천착한 서양 화가로, 청결하고 단순·담백하며, 긴장된 몰입을 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대표적 작품으로 1940년대의 〈배〉 시리즈, 1950년대의 〈자화상〉〈조선장〉, 1960~1970년대의 〈목포항구〉〈무등산〉〈여인-인물〉 시리즈 등이 있다.
이강하
1953년 영암에서 태어나 이강하는 단청그림과 상여제작을 하는 부친을 보며 어린시절 그림과 전통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과 자질을 갖추어 갔다. 그는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중 시민군 일원으로 동참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0년대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자생력을 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불상이나 사대천왕, 발, 탈 등 오방색을 작품에 활용했다. 90년대 이후 그는 영산강과 무등산 연작을 통해 조형성만이 아니라 미적정신에까지 그 범위를 확대시켜 남도땅의 역사와 사상, 미학을 분석과 재해석, 정통정신을 현대적 어법으로 표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촉했다. 무등산과 영산강 주변의 역사적 한과 통일을 향한 염원을 사실주의적인 방식으로 화폭에 담아온 이선생은 치열한 작가정신과 꼼꼼한 제작기법, 엄청난 제작량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생전 5권의 화집을 발간하고, 개인전 8회, 100여회의 그룹전 및 기획전에 초대된 이선생은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일본과 중남미, 러시아, 지중해 등을 돌며 기록한 기행문과 풍물화를 무등일보에 연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 2008년 3월 5년여간의 투병생활 끝에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현승
다형 김현승 시인은 평생 양심과 엄격함 그리고 종교적인 삶을 살았던 시인이다. 절대고독에 심연의 경지에 오른 시인은 술보다는 차를 좋아하며 다형(茶兄)이라는 아호를 가졌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갈까마귀는 양림산을 자주 날아다녔고, 〈가을기도〉, 〈플라타너스〉 등은 양림교회가 있는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구상했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지은 〈눈물〉이라는 시는 시비에 새겨 무등산 오르는 길목 플라타너스 나무옆에 서 있다. 숭실 전문학교 시절 스승인 양주동 선생을 추전으로 시 〈쓸쓸한 겨울저녁이 올 때 당신을〉로 등단하였다. 이후 다시 광주에 돌아와 신사참배 불응으로 일제에 투옥되었다.
그의 태생지는 평양이었으나 그의 부친이 광주에 정착함에 따라 양림동은 그가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냈던 마을이다. 그러나 그가 즐겨 산책했던 양림교회(기장)로 오르는 황톳길은 포장이 되고 큰 나무들은 잘려나가고 그 앞 논밭들은 이제 주택으로 가득찼다. 문학에 이끌려 그를 따르던 후배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던 그의 집마저 헐려나가고 없다. 그는 광주 문학의 대부요 정신적 기둥이었다. 그를 통해 문단에 등단했거나 그와 교감했던 작가들은 그를 〈광주문학의 대부였다〉로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절대고독
- 다형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다형 탄생 100주년 기념
2013. 9. 28
건립 : 광주광역시
다형 김현승 기념사업
서서평
1889년 9월 독일에서 태어난 서서평은 미국 남장로교 해외파견 간호선교사로서 선발되어 1912년 한국의 광주에 처음 발을 딛었다. 광주제중병원에서 4년 근무하다가 군산 예수병원, 서울세브란스병원 간호학교의 교사를 거쳐 1919년 제중병원 간호사를 하기위해 다시 와서 1934년 그녀의 생명이 다하기까지 광주에 살았다. 세브란스병원 간호학교 교사였고 광주 나병원 간호학교, 광주 이일학교에서 간호학을 교수하는 관련된 책을 번영하여 당시 간호학계에 도움을 주었다. 1922년 진다리 교회와 광주 이일학교를 설립하였고 12월에 기독교교회 여성조직이며 교회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구제와 자선활동의 동력을 이루는 부인 조력화를 조직하였다.
32살의 처녀의 몸으로 한국에 와 그는 1910년 이후 한국에 군산병원-세브란스-제중병원 서양무명배 저고리와 검정통치마에 남자용 고무신을 신고 금주 금연운동, 인신매매 반대, 축첩금지, 공창제도폐지 운동을 벌였으며 고아들을 11명이나 양자로 입양시켜 먹여살리고 교육시켜서 해외로 내보내서 그 아들이 잘 자라 세계 곳곳에 훌륭한 일들을 하고 있다고 한다.
어비슨
어비슨은 세브란스의전, 제중원을 발전시킨 근대의료의 선구자이자 고종황제 어의인 어비슨(에비슨, 어비신) 박사의 아들이다. 광주 3·1만세운동 주역들이 1920년 오기원 기념각에서 광주 기독교 청년회(YMCA)를 조직,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을 펼쳤다.
일제하 피폐된 농촌을 살리려 1925년 농촌 야학, 신용협동 조합 등을 전남각처에 조직, 문맹퇴치, 농민운동, 농사법개량, 농산물 제값받기 운동전개, 1926년 북미 YMCA의 농사전문가 어비슨이 합류. 사재를 털어 농촌운동을 지원하였다. 1933년 농촌소년실습학교를 세워 지도자를 육성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1933년 중단하였다.
피터슨
피터슨목사는 광주상공 헬기기총 사격을 목격, 신군부의 폭력을 국내외에 증언했다. 1970년대 호남민주인권운동의 주요 보루이던 양림은 5.18 때 교인들이 수배, 수감, 부상, 피살당하기도 했다. 양림인들은 민주항쟁, 헌혈 부상자치료 희생 자구제헌금, 불의에 대한 지속적인 설교와 기도, 청문회 증언 선교사들을 통한 해외증언을 하였고 신군부로부터 교회지도자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배유지
배유지는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 기독교을 전파하기 위해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이다. 배유지라는 이름만 들어서는 한국사람인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데, 본명이 유진벨이다.
미국 Kentucky주에서 출생하여 신학대를 졸업한 후, 그는 1895년 봄 28세의 나이로 한국에 입국하여 목포와 광주 등지에서 선교부를 창설하여 선교활동에 힘썼고, 북문안교회 수피아, 숭일학교를 설립하였다. 1925년 9월 28일 광주에서 세상을 떠나 양림동에 묻혔는데, 그 후손들이 현재 5대째 유진벨의 뜻을 이어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배유지는 1895년 4월 한국에 도착해서 1925년 9월 광주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30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