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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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지영동 산19
탐방로그
김찬 공적비는 고양시 일산동구 지영동 산19에 위치하며, 공적비만 존재하고 묘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獨立有功者 義士 金燦 功績碑(독립유공자 의사 김찬 공적비)
김공은 1884년 5월 21일 개성 김계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명 용흘이고 아호는 백포이다. 재능이 기발하여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일찌기 인술에도 빼어남으로서 명의로서의 찬탄이 자자하였다. 때마침 국운이 기울여 왜의 침략이 날로 심하여 감을 개탄한 남어지 동지들을 규합하여 신출귀몰하게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왜경의 감시가 삼엄하게 되자 부득기 모든 가솔을 데리고 만주 장백현으로 이사하였다. 고향을 떠나가는 그 심정이 괴로워서 춘일사양광세객 가산려수인난과의 시구도 읊었도다. 그곳에서 농장을 위장하여 항일용사를 양성시켰다. 나아가서 본인이 선봉이 되여 압록강 연안을 누비면서 주재소 및 신갈파경찰서를 습격함으로서 독립군 13명을 탈출시켰으나 왜경의 보복을 받아 농장막사가 방화 사격을 당하여 훈련생교 10명과 아들 희영 희규도 총살되었다. 그 후 1919년 8월 4일 군비단을 조직함에 즈음하여 이은경을 단장으로 본인은 군사참의장에 피선되어 국내에 잠입 작탄으로서 폭동을 일으킴을 주목적으로 하여 투쟁하였다. (안도산전서 727면 기) 1921년 10월 14일 상해임시정부 지령으로 재만 항일 각 단체들을 결합시켜 대한민국단을 조직함에 있어 군사부장에 피선되어 장정 훈련과 군자금 모집 및 군수품 공급에 헌신하였다. (대한독립운동사 5권 316면 기) 그 후 년조 미상이오나 군비단장에 취임되어 거의 30여년 긴 성상을 거처 동삼성 일대를 구석구석 누비면서 항일투쟁한 혈투에 공은 지금도 겨레의 앙모 속에 엄연히 남아있도다. (한남도지 600면 기) 이에 대한민국정부는 그 굳건한 호국충절을 후세에 높이 기리기 위하여 1977년 12월 19일 대한민국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독립유공자공훈록 제4권 322면 기
정치학박사 청옥 김명진 삼가 지음
동만일우에서 남긴 공의 시 1수

불충의 한을 가슴에 안고
하눌에 하소연하였건만 대답없구나
찬바람 휘몰아치는 겨을밤
불효를 뉘우쳐 눈물만 줄기 줄기
1985년 9월 만추 북청유지 일동 근립
도감 김주형 유사 김경종
감훈 이두영 강병각 양홍식 한길섭 주상식 김형술 이현문 김경길 이종승 김현표 박덕호
직계손 소재 묘연 족제 인극 태극 후예 보존
독립유공자 의사 김찬 공적비
관리번호 15-1-17 /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지영동 산19 / 관리자: 개성김씨 북청파 종친회
이곳에 건립된 독립유공자 의사 김찬 공덕비는 일찍이 조국 광복에 뜻을 두어 장백현 군비단 등 항일투쟁 단체를 조직하여 군수품 조달 및 수많은 항일 투사를 훈련시켜 국경지대의 일본 경찰서 및 주재소를 공격하고 피랍된 독립군 13명을 구출하는 등 30여년 동안 만주 동삼성을 누비면서 항일 투쟁을 전개한 선생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높이 찬양하고 그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12월 22일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 공적비 건립일: 1985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