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남일 순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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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서오층석탑 2길 1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광주공원 내에는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도 있었다.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50-1-8
관리자 : 광주광역시 광주공원관리사무소

이 비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전과를 거두고 순국한 심남일 의병장의 뜻과 행적을 길이 전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심남일(沈守擇, 1871~1910)은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강진, 퇴계원, 남평, 나주 등지의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1909년 5월에는 안규홍(安圭洪) 의병진과 합세하여 일군을 섬멸코자 하였으나, 의병 해산의 조칙이 내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1910년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 곳을 찾으신 분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순국선열을 추모하고 주변 정화에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義兵將 南一 沈公 殉節碑(의병장 남일 심공 순절비)
義兵將 南一 沈公 殉節碑(의병장 남일 심공 순절비)
사람은 생명으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 아니요. 진실로 의기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라. 족히 생명을 버리면서도 굳이 그 의기를 살리는 것이니 그러므로 범상한 사람은 일신의 작은 영행만을 탐하지마는 영명한 사람은 오직 대의에 살고 대의에 죽어 그 이름을 천추에 전하는 것이다. 여기 일생을 조국 수호의 제단에 바친 의병장 남일 심공은 본관이 청송이요. 려말의 절신 둔재 계년의 후예요. 둔운처사 의봉의 장남으로서 고종 6년 을사 서기 1869년 2월 15일에 전남 함평군 월야면 산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민하고 재질이 뛰어난 위에 성경과 현전을 배워 충효의 뜻을 깨달아 자기의 갈 길을 정하고 병서와 역학을 읽어 무술의 묘법을 익힘으로써 내일의 국난에 시비하더니 을미년 서기 1895년 일본의 손에 국모가 살해된 뒤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공은 27세의 청년으로서 비분한 뜻을 참지 못했고 10년이 지난 뒤 이른바 을사매국조약이 체결되자 공은 산업을 폐하고서 오직 왜적을 내쫒고 국권을 되찾기 위한 경론에만 몰두하더니 다시 2년뒤에 정미년에 고종의 폐위와 함께 군대마저 해산되므로 공은 비로소 의병을 일으켜 함평군 신광산중에서 훈련을 거듭하며 각도에 격문을 전하고 왜적을 따르는 빈이배들에게 경유문을 뿌리자 수월동안에 각처로부터 모여든 이병들이 무릇 56백명을 넘었다. 이듬해 무신년 40세되던 해 3월 제1차 강진 오치전투에서 왜적 수십급을 목베고 그로부터 무릇 3년 동안에 전후 15회를 싸웠는데 장흥 곽암과 신풍과 남평 장담원과 거성동과 능주 노구두와 석정과 풍치와 영암 사촌과 나주 반치와 해남 성내와 보성 웅치와 천동 등에서 왜적의 날카롭고 수많은 군대와 마주 싸우며 어느 때는 기이한 계책으로써 또 어느 때는 무서운 담략으로 오직 전승무패한 의병장이요 엄격한 규율 중에서도 언제나 부하와 함께 감고를 같이 했으며 민중을 사랑하고 어루만지므로 누구나 공을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건마는 때는 이미 다되어 쓸어지는 나라를 떠받들 길이 없고 의병해산의 조서까지 내려 사기마저 꺽이므로 공은 앙천호곡하기를 말지 못했었다. 그리다 기유년 8월 26일에 능주 풍치에서 적에게 잡혀 광주감옥에 갇혔으되 왜장을 꾸짖는 늠름한 자세는 자못 태산에 비길만 했고 그해 12월에 대구로 이송되어 왜의 법정에도 대의를 들어 웅변하고 온갓 고난에도 굽히지 않은 기백은 참으로 열일에 견줄만 했으며 마침내 경술년 서기 1910년 2월에 적의 교수대에서 향년 42세로써 태연자약하게 순국하신 완전한 시사여귀의 모습이라. 우리는 오늘 여기 공의 뜻과 행적을 돌에 새겨 길이 전하고 자주독립 노선으로써 우리 민족의 갈 길을 삼으려 한다.
서기 1972년 1월 일 후학 이은상 찬, 신호열 서
의병장 남일 심공 순절비 건립위원회 수
沈 義將 殉節 碑銘(심 의장 순절 비명)
沈 義將 殉節 立 贊助員 芳名碑(심 의장 순절 립 찬조원 방명비)
의병장 남일 임공수택 순절비 건립사실기
조국이 광복됨과 더부러 애국선열을 숭봉하는 사업이 민족정기를 위한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였다. 의병장 남일 심공은 기중의 걸연한 분이라 누구나 다 추모하는 마음 간절했으나 세사다난하여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더니 4303년 경술 2월 마침내 거국적으로 유론이 재발하여 순절비건립위원회가 구성되여 관공서 및 각계 유지의 성금으로 3개 성상에 걸쳐 공역을 끝마쳤으니 족히 병○의 불민을 볼 수 있다 하리로다. 부녕이 외람되이 시역의 실무를 담당하여 유종용 김유신 박남순 고몽우 최종욱 등 제씨의 종시 탄로로 극저우성하였으므로 여기 그 전말를 간략히 적고 찬조원의 방명비를 세우는 바이다.
단기 4306년 계축 5월 일 운산 신홍렬 찬병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