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광주광역시 광산구 명도동 137-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사 오상열 순절 기적비
항일의사 오상열은 1879년(고종 17년) 광산구 명도동 대명동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항일구국의 큰 뜻을 품고 영사재에서 무예를 닦는 한편 화약 등 무기를 만들어 의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07년부터 함평․나주․담양․광주 등에서 왜적과 대항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적에 비해 무기가 열악하고 병사가 부족하여 결국 1908년 12월 23일 엄동설한에 임곡 사호치에서 왜적과 치열히 싸우다 향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순절하였다.
1907년 10월 15일 의병으로 첫 출전하면서 부인 배씨에게 남긴 유시가 의사의 충과 효를 잘 나타내준다.
吾生未可必(오생미가필) 내 삶을 기필하기 어려우니
須護腹中兒(수호복중아) 모름지기 뱃속의 아이를 잘 보호하시오
不恨死當死(불한사당사) 마땅히 죽을 때 죽는 것은 한이 없으나
親年六十餘(친년육십여) 어버이 연세 예순이 넘으시니 그것만이 마음에 걸리네
※ 1977년 12월 13일 대통령 건국포장 추서
항일의사 오상열은 1879년(고종 17년) 광산구 명도동 대명동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항일구국의 큰 뜻을 품고 영사재에서 무예를 닦는 한편 화약 등 무기를 만들어 의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07년부터 함평․나주․담양․광주 등에서 왜적과 대항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적에 비해 무기가 열악하고 병사가 부족하여 결국 1908년 12월 23일 엄동설한에 임곡 사호치에서 왜적과 치열히 싸우다 향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순절하였다.
1907년 10월 15일 의병으로 첫 출전하면서 부인 배씨에게 남긴 유시가 의사의 충과 효를 잘 나타내준다.
吾生未可必(오생미가필) 내 삶을 기필하기 어려우니
須護腹中兒(수호복중아) 모름지기 뱃속의 아이를 잘 보호하시오
不恨死當死(불한사당사) 마땅히 죽을 때 죽는 것은 한이 없으나
親年六十餘(친년육십여) 어버이 연세 예순이 넘으시니 그것만이 마음에 걸리네
※ 1977년 12월 13일 대통령 건국포장 추서
義士 義濟(의사 의제)
義士 吳公 殉節紀蹟碑(의사 오공 순절기적비)
義士 吳公 殉節紀蹟碑(의사 오공 순절기적비)
의사 의제 오공 유적보존회원 방명비
의사 오공의 휘는 상렬 또는 인섭이요 자는 화일이며 호는 의제이시다. 일찌기 난와 오 선생께 사사한 바를 학행이 탁월하시고 장년기에 이르러서는 무예가 뛰어나 그 이름 향리에 떨치더니 마침내 조국이 일제의 침략을 받게됨에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고 의병의 선봉에 서게 되였다. 공은 출진에 앞서 내 삶을 기필치 못하니 복중아를 잘 기를지며 내 마땅히 죽음은 한치는 않으나 노령의 어버이 섬기지 못함을 원통함이여 오생미가필수호복중아불한사당사친년육십여라는 유시일편을 부인께 남기고 출전, 의사 죽봉 김태원 준과 더불어 광라장창각지에서의 용전은 물론이요 특히 담양 무동촌전에서 왜장 길전을 사살함에 전세가 크게 떨치더니 어등산전에서의 김장군의 전사로 공은 다시 용과 의를 정려하야 의사 해산 전수용과 합세 포진한 바 용진사호치에 분진하여 일주야에 걸친 혈전으로 왜병수십을 사살하고 장렬히 순절하시니 오호라 슬프도다. 이날이 1908년 무신 12월 23일이라 공은 조국광복 후 건국포장이 추서되고 각처인사들의 협찬으로 가마별구에 의적비는 건립되였으며 묘소에는 묘비 및 묘성역화가 이루어졌다. 공의 우국충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향중에서는 유적보존회를 조직하였고 보훈처와 행정당국에서는 향토위인선현유적현창사업시책의 일환으로 제보조가 이루어짐이니 일편석에 대요를 새김이다.
의사 오공의 휘는 상렬 또는 인섭이요 자는 화일이며 호는 의제이시다. 일찌기 난와 오 선생께 사사한 바를 학행이 탁월하시고 장년기에 이르러서는 무예가 뛰어나 그 이름 향리에 떨치더니 마침내 조국이 일제의 침략을 받게됨에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고 의병의 선봉에 서게 되였다. 공은 출진에 앞서 내 삶을 기필치 못하니 복중아를 잘 기를지며 내 마땅히 죽음은 한치는 않으나 노령의 어버이 섬기지 못함을 원통함이여 오생미가필수호복중아불한사당사친년육십여라는 유시일편을 부인께 남기고 출전, 의사 죽봉 김태원 준과 더불어 광라장창각지에서의 용전은 물론이요 특히 담양 무동촌전에서 왜장 길전을 사살함에 전세가 크게 떨치더니 어등산전에서의 김장군의 전사로 공은 다시 용과 의를 정려하야 의사 해산 전수용과 합세 포진한 바 용진사호치에 분진하여 일주야에 걸친 혈전으로 왜병수십을 사살하고 장렬히 순절하시니 오호라 슬프도다. 이날이 1908년 무신 12월 23일이라 공은 조국광복 후 건국포장이 추서되고 각처인사들의 협찬으로 가마별구에 의적비는 건립되였으며 묘소에는 묘비 및 묘성역화가 이루어졌다. 공의 우국충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향중에서는 유적보존회를 조직하였고 보훈처와 행정당국에서는 향토위인선현유적현창사업시책의 일환으로 제보조가 이루어짐이니 일편석에 대요를 새김이다.
광주 광산구 명도동 137-7 가마마을 입구 오상렬 의병장 순절기적비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