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유계리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愛國志士 長老 溪巖 永川李公 之墓
(애국지사 장로 계암 영천이공 지묘)
(애국지사 장로 계암 영천이공 지묘)
공의 휘는 상호 자는 하응이신 장로님은 풍운이 감도는 구한말 1890년 12월 3일 영천이씨 시조 고려때 평장사 문한공의 34세손 휘 만현 자 용서공과 현풍 곽남이여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중조 휘는 수춘 상장군 평장사이시고 입향조 휘는 온공이시요 고조 휘는 태상 자는 자성 증조 휘 형자 자는 군매 조 휘는 장 자는 공뫼이시다. 장로님은 기골이 장대하시고 준엄하시며 성품이 온후활달하여 사소한 일에는 구애를 받지 않으시었다. 유시부터 한문사숙에서 근10여년간 한학을 수업 탁월한 재능은 학우들에게 수범이 되였고 암묵한 초대교회시대 즉 1917년 2월 2일 송라 대전교회 이익호 영수에게 복음전도를 받아 청하 덕성교회에 1년간 다니다가 1918년 4월 유계교회를 창설하시고 부인 김정순
권사와 초기 유계예배당을 친히 건축하여 구영성업에 전심진력하시며 영수로 시무하시던 중 기미년 3.1독립운동에 직면 평소 애국애족정신이 투철한 장로님은 직각 거사에 참가키로 결심하고 여러 동지등을 규합하여 만반태세를 갖추고 청하지역에 선두적 역할로 주도면밀하게 계획추진하여 기미년3월 12일 청하시장을 기하여 오용천씨댁에서 지사들과 숙의 거행 태극기를 높히 흔들며 보무당당 의기양야하게 독립만세를 외치며 덕천리 미남리를 경유하여 청하시장을 일주하니 면민도 합세 함성은 천지를 진동 행진중 청하주재소앞에 도달하자 무장한 일본경찰이 제지 억울하게 일본관헌에 체포당하여 대구형무소로 송치 투옥되어 1년여에 옥고를 치루었으니 혹독한 고문이며 그 엄청난 고애이야 필설로 어찌다 표하리요 출옥후에도 삼엄한 일본경찰에 감시를 피하며 백척불굴 암암리에 독립운동을 지속하였으며 만주까지 망명활동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유계교회를 거점으로 후진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 함양시킨 살신성인 멸사보국하신 숭고한 애국표정의 발로인지라 이 땅에 태어난 후세만인의 귀감이라 아니이르랴. 1936년 11월 경동노회 창립시 유계교회 장로 장립을 받고 희생적 봉사헌신 진력한 독특신조는 성도들에게 모범됨이 지대하였고 1945년 8.15광복은 되었으나 민족적 혼란이 극심함에 사회정화에 화신이 되어 동분서주하시다가 1954년 6월 12일 향년 64세로 소천하시다. ..후략..
포항시 북구 청하면 유계리 528 애국지사 이상호(유계리)의 묘소를 찾았다.
유계리 마을 유래
서정천의 발원지인 궁곡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을 따라 덕성산과 호학산 줄기가 형성한 큰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조선 명종 원년 을사사화때 황해감사로 있던 윤상문이 이 마을에 유배되어 하천계곡 서쪽마을 즉 서계리라 불렀으며, 하천에 돌이 쌓여 물이 쉽게 잦아들어 건천동,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아 유계리로 개칭하였다..
마을 북쪽 안 골짜기는 궁곡, 황배이골, 왜명동 등의 지명이 있으며, 신라시대 황방사 절터에 1943년 법성사가 건립되었다.
마을 동편 하천변에 오리에 뻗친 풍치림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총 개머리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벌채되었고, 현재 1천여 평에 50여 그루의 노거수가 남아있다.
1919년(기미년) 3월 12일 청하장터에서 나라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의거를 일으킨 주동자(청하 8인, 송라 15인) 23인중 한 사람 이상호(1890 ~ 1954) 독립의사의 생가가 있고, 마을 서편 작은 언덕위에 그의 묘소가 있다.
서정천의 발원지인 궁곡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을 따라 덕성산과 호학산 줄기가 형성한 큰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조선 명종 원년 을사사화때 황해감사로 있던 윤상문이 이 마을에 유배되어 하천계곡 서쪽마을 즉 서계리라 불렀으며, 하천에 돌이 쌓여 물이 쉽게 잦아들어 건천동,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아 유계리로 개칭하였다..
마을 북쪽 안 골짜기는 궁곡, 황배이골, 왜명동 등의 지명이 있으며, 신라시대 황방사 절터에 1943년 법성사가 건립되었다.
마을 동편 하천변에 오리에 뻗친 풍치림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총 개머리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벌채되었고, 현재 1천여 평에 50여 그루의 노거수가 남아있다.
1919년(기미년) 3월 12일 청하장터에서 나라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의거를 일으킨 주동자(청하 8인, 송라 15인) 23인중 한 사람 이상호(1890 ~ 1954) 독립의사의 생가가 있고, 마을 서편 작은 언덕위에 그의 묘소가 있다.
愛國志士 長老 溪巖 永川李公 之墓
(애국지사 장로 계암 영천이공 지묘)
(애국지사 장로 계암 영천이공 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