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승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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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문봉동 산42-1
탐방로그
이희승 묘는 고봉동 행정복지센터로부터 약 800m 떨어져있으며, 고봉동 행정복지센터 건너편에 있는 로얄새들승마클럽 뒷편에 있다. 따라서 로얄새들승마클럽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가야 한다. 이희승 묘에는 묘비와 추모비가 함께 있으며, 이희승 묘 위쪽에는 이희승 부친 묘소도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문학박사 일석 전의 이공 희승지묘, 부인 경주이씨 정옥 부좌
(文學博士 一石 全義 李公 熙昇之墓, 夫人 慶州李氏 貞玉 祔左)
군의 성은 이요 휘는 희승이요 자는 성세요 호는 일석이다. 고려 개국공신 태사 전산복성절공 탁의 27대손이요 정당문학예문관 대제학 문의공 언중의 19대손이요 좌참찬 졸옹 문형의 12대손이며 고 종식은 중추원의관이요 비는 밀양박씨이다. 부군은 단기 4229년 병신 공력 6월 9일에 생하여 4322년 11월 28일에 졸하였으며 벽제읍 문봉리 오좌원에 안장하였다. 부군은 426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연구하였다. 4274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국립 서울대학교 교수로 문리대학장, 대학원 부원장을 지내고 4286년부터 1년간 미국 국무성 요청으로 캘포니아 대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언어학을 연구하였다. 그후 성균관대학원장, 단국대학교 동양연구소장, 동아일보 사장등을 역임하였다. 서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를 영획하였으며 학술원에서는 종신회원이 되었고 공로사을 받았고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단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국어학개론집, 박꽃 찢어진 피리, 수필집 벙어리 냉가슴 외 3권, 국어대사전 등이 간행되었다. 배 경주이씨 정옥은 승익의 따님이니 4228년 7월 3일에 나서 4320년 12월 29일에 졸하여 묘는 합펌되었다.
불초남 교웅 경식 안동 김충현 서
을유 광복 후 초 임신 6월 9일 근수
一石 李熙昇 先生 追慕碑(일석 이희승 선생 추모비)
여기 겨레의 스승이요 지사이신 한어른께서 고이 누워계시다. 경술국치이래 세상이 여러번 바뀌었으나 선생은 그 꼿꼿한 지조로 백년을 하루와 같이 겨레의 사표이셨다. 세상에 스승이 많으나 선생처럼 고결한 스승이 몇분이나 되며 불의 부정과는타협하지않고 대쪽같이 곧은 기개로 한 평생을 지내는 동안 만인의 숭앙르 받ㄱ았던 어른은 또 몇분이 되리오. 선생은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에서 태어나 18세부터 국어연구에 뜻을 두어 조선어학회에서 1933년에는 회원들과 민족의 숙원이었던 한글 맞춤법을 완성하였고, 42년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을 주모한 한분으로 3년간여의 혹독한 옥고를 치르시었다. 광복후 서울대학교 교수가되어 국어학연구의 길에 선도자로서 등불을 비추셨으니 특히 그 문법론은 사학의 우뚝한 봉우리였고 남의 추종을 불허하는 국어 대사전을 엮어 펴내는 한편, 시작과 수필로 뛰어난 문재를 드러내기도 하셨다. 한때는 동아일보 사장과 한국어 문교청연구회 회장을 맡아 언론창달과 어문교육시정에 공헌하였고, 현정회 이사직으로서 국조이신 단군의 존숭사업에도 앞장서셨다. 선생은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한 정재로 장학사업과 학회육성에 크게 이바지하셨고,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워 따르는 제자가 줄을 이었다. 9순에도 오히려 낭낭하시던 그 음성이 아직도 들려오는 듯 한데 80년을 해로하시던 사모님과 함께 계시니 높은 풍교가 겨레로 더불어 길이 빛나리로다.
이희승 묘는 고봉동 행정복지센터로부터 약 800m 떨어져있으며, 고봉동 행정복지센터 건너편에 있는 로얄새들승마클럽 뒷편에 있다.
로얄새들승마클럽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