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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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2리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산 입구에서 오른쪽 길로 가면 쉬운 길이었는데, 왼쪽으로 가면 힘든 길이었다.
후손되시는 분이 월중 이상호 선생 묘소의 주소 오덕리 산 82-4번지와 가는 길을 알려주셨다.
獨立鬪士 月中 李相浩 先生 之墓(독립투사 월중 이상호 선생 지묘)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저버린 의사들의 충혼은 청사에 길이 빛난다. 망하는 나라를 그냥 두고만 볼 것이던가. 우리 역사는 그렇지 않다.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을 바치기도 하고 몸을 던지기도 하였다. 국난을 당하면 임금님께 상소도 하고 민족에게 고하기도 나라 밖에 외치기도 하여 억울한 사정을 낱낱이 알려 기어이 국권을 찾고야 말았다. 외롭고 괴롭게 싸우던 선열들의 피어린 열매는 살아있는 후손들에게 은택을 입게 하였으니 어찌 거룩치 아니하랴. 여기 한 많은 일생을 구국운동에 몸 바친 의사가 있으니 이가 바로 독립투사월중이시다. 선생의 휘는 상호요, 영천인이니 고려 신호위 대장군의 휘 대영의 21세손이다. 충의가 세전하여 임진왜란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판관 벼슬을 제수받은 오도 입향 선조이신 휘 인석의 11세손이며 고조의 휘 광경이니 문행이 있었고 증조의 휘는 화기요, 조의 휘는 우정이요, 고의 휘는 흥락이요, 자는 주언 호는 태암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하루는 야몽에 입향 선조 판관공 묘측에 손성인이 투장하였다고 신인이 고하므로 이상히 여겨 날이 밝기를 기다려 십리 길을 단숨에 달려가 성묘하니 사실이 확연한지라 투장한 주인을 찾으니 왜인의 앞잡이인지라. 일이 순조롭지 못함을 알고 투장한 묘를 단독심굴하고 마침내는 왜인의 하수격인 손성인에게 피소되어 충북 단양에서 3년간의 옥고를 살았다. 태암공의 효행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은거 사람이 선행을 장기하여 나라
님께 상주하니 장사랑 참봉이 제수되었다. 비 밀양박씨 사이에 아들 넷을 두니 상일 상호 상현 상희이다. 선생은 태암공의 차남으로 1876년 광무 10년 병자 5월 20일 기계 오도에서 출생하시니 골격이 준수하고 의용이 헌앙하며 경사에 전통하여 항상 대의명분을 앞세워 忠則盡命(충즉진명)하고 孝則竭力(효즉갈력)하는 가훈을 이어받아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자서하고 학문에 전념하던 중 1905년 을사위약이 늑결되고 왜병이 우리 강토를 활보하자 선생은 29세의 젊은 나이로 구국 안민을 위한 충지의 일념으로 잃어버린 국권을 찾기 위해 창의할 것을 친전에 고하고 당시 의진을 모집 중이던 영천 정환직 정용기 대장을 탐방하여 의진 결성을 모의한 후 1906년 5월 영덕 청하 흥해 등 동해 연안에 활거하는 왜병을 토벌하기 위하여 정용기 대장은 영천에서 모병하고 선생은 경주 기계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양웅이 기계구지 안국사에서 합류 의진을 인솔 출정하니 당시 선생은 산남의진의 참모장으로 군수조달을 책임지고 각처에서 모집한 화총 80정과 군량미 2백석을 송진하니 의병들의 사기가 충천하여 청송과 직보 등지를 공략하여 많은 전과를 남겼다. 여세를 몰아 신녕 의성을 공격하하고 다시 남하하여 동해안으로 진격하자 왜병이 죽장 입암에서 잠복중이다가 의진과 접전하여 혈전을 거듭한 결과 정대장은 전사하고 의병은 크게 패하였다. 선생은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의진을 지휘 대열을 재정비하니 잔여병은 수 십 인에 불과하였다. 철군하여 다음을 기약하고 동지를 규합 보현산에 퇴진하고 있을 당시 선생은 친상을 당하여도 집상치 못하고 사력을 다하여 동해안으로 진군하다가 영덕 주방 전투에서 선생은 크게 부상 당하고 정환직 대장은 왜병에게 체포되니 부상당한 몸으로 단독 잔여병을 진두지휘하여 항쟁하였으나 동지들은 크게 부상 당하고 전멸 상태였다. 같은 해 10월에 선생이 은신 중 흥해시장에서 왜헌에게 체포되어 포항으로 압송 옥고 중 1908년 2월 감옥에서 탈옥하여 관동지방에서 숨어 살면서 의병 재규합을 모책하고 백남억 김태환 동지들과 죽장 보현산에 출병을 꾀하다가 왜헌에 탈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처를 입고 신음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고향에 돌아오니 가문은 황폐하고 친상은 탈상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청천백일은 옛처럼 비추건만 부모님께 불효한 죄 씻을 길이 없어라 해뜨는 비학산과 달지는 약동지를 향해 소리쳐도 숙초에 잠드신 그 은혜 갚으오리요.일생을 조국 광복과 민족생존을 위해 몸 바쳐 싸우시다 1949년 4월 25일 타계하시니 향년이 74세이다. 배는 곡부공씨 진주강씨 월성이씨이며 슬하에 1남 5녀를 두니 남은 호연이요, 여는 손진환 김종섭 윤응모 손수용 허동섭이다. 손은 2남 3녀로 손남은 의몽 의영이요, 손녀는 이종국 손상익 최석호이며 외손은 손진환의 아들 사익 중익 삼익 유익이요, 김종섭의 아들 공산 윤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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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강상이 끊이지 않았기에 이 땅에 서광이 비쳤도다. 선생이 가신지 이미 오래였건만 자손이 미력하여 정표치 못하다가 1980년 8월 15일 제35주년 광복절에 건국유공자로 대통령포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은 비록 가셨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충혼은 영원히 살아있으리라.
1984년 갑자 10월 일 안동대학교수 안병렬 짓고
종손 이희특 쓰다.
정부지원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