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성법리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금세기의 초 이 강토를 침략한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고귀한 일생을 마친 장부가 있으니 그는 곧 이 고장 출신 윤응원 의사이다.
자는 덕오요, 호는 해강이며, 파평윤씨로 정정공 휘 번의 후예이니 곧 입시향조 휘 동한의 11대손이다. 조 휘 경○이요, 고는 휘 관문이며, 비는 경주김씨 회의 여로 1876년 이곳 경주땅 기북의 성법리에서 공을 탄생하니 천품이 정의롭고 강직하였으며 체격이 장대하고 여력도 출중하여 소년기부터 장군이라 별호가 있었다.
선비 가문의 대를 이어서 일찍부터 서당에 나가 경전을 익히다가 왜적들의 농간으로 국정이 점점 쇠퇴해져감을 보가 북받쳐오르는 의분심을 안고 이를 갈며 후일의 대용을 위하여 무술도 겸해 연마해서 때를 기다렸더니 왜적들의 침식이 노골화 되어서 전국으로 확산해 감을 알게 되자 그만 붓을 던지고 개나리 봇짐으로 여장을 차려서
자는 덕오요, 호는 해강이며, 파평윤씨로 정정공 휘 번의 후예이니 곧 입시향조 휘 동한의 11대손이다. 조 휘 경○이요, 고는 휘 관문이며, 비는 경주김씨 회의 여로 1876년 이곳 경주땅 기북의 성법리에서 공을 탄생하니 천품이 정의롭고 강직하였으며 체격이 장대하고 여력도 출중하여 소년기부터 장군이라 별호가 있었다.
선비 가문의 대를 이어서 일찍부터 서당에 나가 경전을 익히다가 왜적들의 농간으로 국정이 점점 쇠퇴해져감을 보가 북받쳐오르는 의분심을 안고 이를 갈며 후일의 대용을 위하여 무술도 겸해 연마해서 때를 기다렸더니 왜적들의 침식이 노골화 되어서 전국으로 확산해 감을 알게 되자 그만 붓을 던지고 개나리 봇짐으로 여장을 차려서
동지를 찾아 정처없이 집을 떠났다.
그로부터는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편단심으로 고되고 험한 형극의 외길이 연속될 뿐이었으나 원수를 노려보며 서릿발 치는 적개심은 갈수록 더욱 서슬이 푸르렀다.
마침내 각지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러날제 공은 경기도 가평에서 박덕삼 의병진에 들어갔으니 그해가 1906년 3월이요, 공의 나이는 당년 31세였다. 그 후로는 줄곧 서울 근교인 양평 광주 양주 포천 등 경기도 일원을 비롯 강원도의 춘천 홍주 양구 등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연이어 왜적과 혈전을 거듭하다가 1907년 12월 7일에는 춘천과 양구 접경인 추곡에서 패전하여 그만 파진되고 말았다. 공은 다시 잔병을 모아 윤태훈 의진에 합류하여 항전을 계속했으나 그 익년인 1908년 2월 하순에는 홍주전투에서 불리하여 세궁역진한 끝에 사로잡혀 그해 9월 19일에 경성지방재판소에서 7년 극형에 처해졌으니 공은 그 후 영영 다시 도라오지 못하였다.
아, 하늘은 끝내 이 나라를 버렸으며 의사도 함게 앗아가고 말았도다.
왜적들의 잔학무도한 박해는 그 유가족들도 그대로 두지를 않았다. 그로 인하여 장자를 잃은 그 부친 관문은 홀로된 그 자부 능성구씨 모자와 차자 응진의 가솔까지 동반해서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광복 후에는 겨우 공의 질부 선영남씨 모자만이 천진으로부터 귀국하여 그 맏이인 회진 「재중」이 공의 독자 기복의 후로 입계하였고 증손에 ○ 「태진」과 현 「태우」이 있으며 현손에는 원욱이 있다.
1990년 광복절에 국가는 공의 충절을 기려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이어서 그 체취가 서린 이곳에 이 비를 세워 그 넋을 기리고 또 이역만리에서 불귀객이 된 그 유족들에게도 위령탑으로 삼고자 한다.
그로부터는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편단심으로 고되고 험한 형극의 외길이 연속될 뿐이었으나 원수를 노려보며 서릿발 치는 적개심은 갈수록 더욱 서슬이 푸르렀다.
마침내 각지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러날제 공은 경기도 가평에서 박덕삼 의병진에 들어갔으니 그해가 1906년 3월이요, 공의 나이는 당년 31세였다. 그 후로는 줄곧 서울 근교인 양평 광주 양주 포천 등 경기도 일원을 비롯 강원도의 춘천 홍주 양구 등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연이어 왜적과 혈전을 거듭하다가 1907년 12월 7일에는 춘천과 양구 접경인 추곡에서 패전하여 그만 파진되고 말았다. 공은 다시 잔병을 모아 윤태훈 의진에 합류하여 항전을 계속했으나 그 익년인 1908년 2월 하순에는 홍주전투에서 불리하여 세궁역진한 끝에 사로잡혀 그해 9월 19일에 경성지방재판소에서 7년 극형에 처해졌으니 공은 그 후 영영 다시 도라오지 못하였다.
아, 하늘은 끝내 이 나라를 버렸으며 의사도 함게 앗아가고 말았도다.
왜적들의 잔학무도한 박해는 그 유가족들도 그대로 두지를 않았다. 그로 인하여 장자를 잃은 그 부친 관문은 홀로된 그 자부 능성구씨 모자와 차자 응진의 가솔까지 동반해서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광복 후에는 겨우 공의 질부 선영남씨 모자만이 천진으로부터 귀국하여 그 맏이인 회진 「재중」이 공의 독자 기복의 후로 입계하였고 증손에 ○ 「태진」과 현 「태우」이 있으며 현손에는 원욱이 있다.
1990년 광복절에 국가는 공의 충절을 기려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이어서 그 체취가 서린 이곳에 이 비를 세워 그 넋을 기리고 또 이역만리에서 불귀객이 된 그 유족들에게도 위령탑으로 삼고자 한다.
광복 후 48년 임신 「서기 1992년」8월 15일
오천 정희영은 글을 짓고 성산 이헌주는 글을 쓰고
경주보훈지청과 영일군 및 대구 경북 광복지회의 후원으로 이 비를 세우다.
오천 정희영은 글을 짓고 성산 이헌주는 글을 쓰고
경주보훈지청과 영일군 및 대구 경북 광복지회의 후원으로 이 비를 세우다.
문중기금 봉헌기
파평윤씨 성법문중은 입향조 남은공 휘 동한께서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400년 가까이 대를 이어왔다. 1734년 천세, 천영, 천원 삼형제 분이 삼로당을 창건하여 문중화합과 학문연마의 도장으로 삼았다. 그후 소실되어 방치되다가 1918년 복원하였으나 100년 세월이 흐른 지금 크게 퇴락하고 문중기금 또한 고갈되어 행사와 사업을 추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문중 어려분의 뜻을 모아 헌성금을 모금하고 여기에 참여하신 분과 아울러 대지를 기탁하여 삼로당 뜰을 넓게 해주신 분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2017년 5월 일
파평윤씨 성법문중은 입향조 남은공 휘 동한께서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400년 가까이 대를 이어왔다. 1734년 천세, 천영, 천원 삼형제 분이 삼로당을 창건하여 문중화합과 학문연마의 도장으로 삼았다. 그후 소실되어 방치되다가 1918년 복원하였으나 100년 세월이 흐른 지금 크게 퇴락하고 문중기금 또한 고갈되어 행사와 사업을 추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문중 어려분의 뜻을 모아 헌성금을 모금하고 여기에 참여하신 분과 아울러 대지를 기탁하여 삼로당 뜰을 넓게 해주신 분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2017년 5월 일
포항시 북구 기북면 성법리 파평윤씨 정정공파 삼로당 정자 내 애국지사 해강 윤응원 추모비를 찾았다.
三老堂(삼로당)
愛國志士 海岡 尹應元 追慕碑(애국지사 해강 윤응원 추모비)
해강 윤응원 의사 기념비 건립기
해강 윤응원 의사 기념비 건립기
애국지사 해강 윤공 응원이 조국 광복을 위하여 순절한 공로는 청사에 길이 빛날 일이다. 그러나 조국이 광복되고 반세기가 흘러 가도록 위적을 천양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뜻있는 자 그 누가 통한하지 아니하였으리요. 마침 청부 중요문서 보관소에서 당시의 재판기록이 발견되었고 국립도서관 소장 독립운동사 의병편에 공이 세운 항일운동의 혁혁한 업적이 명시되어 있어 눗게나마 그 충절이 인정되어 서기 1990년 광복절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게 되었으므로 만시지탄이 없지 않으나 이에 옥중 원혼이 되신 지사의 영령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우리 민족의 정기를 후세에 깊이 전승코자 이 추모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서기 1993년 12월
오천 정동렬 짓고 경주 김주석 쓰다
애국지사 해강 윤공 응원이 조국 광복을 위하여 순절한 공로는 청사에 길이 빛날 일이다. 그러나 조국이 광복되고 반세기가 흘러 가도록 위적을 천양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뜻있는 자 그 누가 통한하지 아니하였으리요. 마침 청부 중요문서 보관소에서 당시의 재판기록이 발견되었고 국립도서관 소장 독립운동사 의병편에 공이 세운 항일운동의 혁혁한 업적이 명시되어 있어 눗게나마 그 충절이 인정되어 서기 1990년 광복절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게 되었으므로 만시지탄이 없지 않으나 이에 옥중 원혼이 되신 지사의 영령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우리 민족의 정기를 후세에 깊이 전승코자 이 추모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서기 1993년 12월
오천 정동렬 짓고 경주 김주석 쓰다
愛國志士 海岡 尹應元 追慕碑(애국지사 해강 윤응원 추모비)
愛國志士 海岡 尹應元 追慕碑(애국지사 해강 윤응원 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