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노곡면 하군천리 43-9
- 탐방로그
- 애국지사 김동호 선생의 사당은 김동호 선생의 생가에서 약 1km 정도의 거리이다. 충절사는 삼척시 노곡면 하군천리 43-9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노곡면 하군천리 43의 2이다.
애국지사 김동호 선생의 사당은 김동호 선생의 생가에서 약 1km 정도의 거리이다.
의사 김동호 독립운동 공적
의사께서는 1879년 1월 16일 강원도 삼척시 노곡면 하군천리 98번지에서 부 김시영의 독자로 출생하였다. 신라 대보공 휘 알지 28세손인 56대 경순왕의 팔자 일선군 휘 추의 자 위옹은 실직군왕 삼척김씨 시조이고, 시생자남은 고려 삼중광태사로 분파 비조이니 의사는 태사공 26세손으로 구한말 교궁신구시비에 신유선봉하였으며 일제시 침략으로 박탈당한 국권회복의 웅지를 품고 1915년 중앙으로 상경하여 박상진 의사 외 15명의 동지와 같이 조국독립과 항일운동을 전개키 위하여 조직의 명칭을 광복단으로 호칭하였으며, 총사령에 박상진을 선출하고 의사는 재무부장 겸 기호 관동지역 지부장으로 임명받아 1917년 봄 광복회의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하고 광복단의 간부 십여명은 남대문 밖에서 남일여관을 위장 경영하면서 광복단의 비밀회합장소로 제공하던 여성단원 어재하의 집에 모여 본격적인 항일투쟁 방침을 결의 일차로 1917년 10월 중진간부별 독립군 양병자금 모금 및 항일투쟁 독립운동구역을 분담케 하고 1917년 10월부터 1918년 1월에 걸쳐 광복군 명의로 광복운동 자금제공을 당부하는 권유문을 자본가 및 친일파에 보내고 응분 염출을 권유한 다음 일제관사가 징수한 세금을 압수하며 악질관사 및 계일반역자를 응징하였고 만주에 의병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병자금을 충당제공하였으며 의사는 1917년 1월 남대문 밖 어재하 집에서 중견간부와 합의하여 광영리 앞길에서 대구로 수송 중이던 경주, 영일, 영덕 세 고을의 자금 팔천칠백원을 징수하여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만주에 독립자금을 직송하였으며 1917년 1월 20일 동지 김경태, 임세규를 시켜 친일파 악질관사인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케 하고 또 동년 11월 10일 군자금 모금을 거부하고 구왕실재산을 가로챈 경북 칠곡군 북상면 장승원 집을 습격하여 사형선고문을 낭독케하고 그 즉석에서 처형함으로서 만천하 친일파의 간담을 서늘하게하여 만인에게 경고한 바 있었으며 동년 부장단을 인솔하여 충남 경산 금광을 습격하여 쟁취한 금괴를 만주로 이송하였다.
조선은행권을 정화로 교환하여 군자금에 충당케 하였고 이와 같은 독립운동이 만주 상해를 비롯 전국 방방곡곡에 확산케 되자 총독부는 전국 헌병경찰에 수사망을 펼쳐 광복단 색출에 혈안이던중 1917년 12월 첩자 이종국의 밀고로 김의사는 경성부 종로 어재하 집에서 동지들과 회합중 체포되어 일경의 잔악한 고문을 받고 1918년 2월 1일 보안법 위반 및 총포 화약 취체법 위반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대심원에서 실형 삼년 감형집행 받아 옥고중에서도 1919년 3월 울진, 삼척 만세사건 20여군에서 74회에 걸친 헌병분소 파괴 경찰서 군청, 면사무소 파괴 군경 충돌 사건을 일으키는 등 관동지방 지휘 지시 책임을 물어 공주 형무소에서 연일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1921년 5월 형기 만료 출옥후 즉시 경기부 종로 인사동에 거주하면서 일본에 거주하는 서양선교사 굴피를 통하여 종교자금을 받아 만주에 보내어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였고 1922년 당시 토지개혁구실로 일제가 행한 왕실재산 국유지 측량 박탈 등의 부당성을 주장 총독을 상대로 소송을 제소한 국사범으로 의사는 재차 3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후 1924년 1월 28일 경성부 묵정동 39번지 황금정에서 식사중 일경의 첩자에 의해 독살케 되어 종세하였다.
의사의 부 김시영 선열은 독자 김동호의 국가 독립 운동 자금 모금 협조를 위하여 사재 임야 18정보와 전답 수백평의 리액 사재를 국난회복 투쟁운동 자금으로 광복단에 헌납동시 독립투사 자가은익 독일선교사 굴피 등 보안법 위반 살인방조 죄복으로 1918년 공주형무소에서 2년 옥고중 기미년 독립만세사건을 부자 옥중지휘와 1921년 왜정 토지 개혁 반대로 조선총독을 상대로 제소한 국사범으로 2년 옥고중 왜경의 잔악무도한 고문에 정신이상으로 폐인이 되어 1932년 8월 18일 고종하니, 오호라 군내 유일무이한 부자 양대가문 순국선열의 애국충절의 공훈을 1977년 12월 대통령 표창, 1990년 12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된 바 있는 김동호 의사는 당시 47세에 서거 기세 79년에 이르렀으며 의사의 부 김시영 선열은 기세 71년에 이르러 금번 의사 김동호 사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의사께서는 1879년 1월 16일 강원도 삼척시 노곡면 하군천리 98번지에서 부 김시영의 독자로 출생하였다. 신라 대보공 휘 알지 28세손인 56대 경순왕의 팔자 일선군 휘 추의 자 위옹은 실직군왕 삼척김씨 시조이고, 시생자남은 고려 삼중광태사로 분파 비조이니 의사는 태사공 26세손으로 구한말 교궁신구시비에 신유선봉하였으며 일제시 침략으로 박탈당한 국권회복의 웅지를 품고 1915년 중앙으로 상경하여 박상진 의사 외 15명의 동지와 같이 조국독립과 항일운동을 전개키 위하여 조직의 명칭을 광복단으로 호칭하였으며, 총사령에 박상진을 선출하고 의사는 재무부장 겸 기호 관동지역 지부장으로 임명받아 1917년 봄 광복회의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하고 광복단의 간부 십여명은 남대문 밖에서 남일여관을 위장 경영하면서 광복단의 비밀회합장소로 제공하던 여성단원 어재하의 집에 모여 본격적인 항일투쟁 방침을 결의 일차로 1917년 10월 중진간부별 독립군 양병자금 모금 및 항일투쟁 독립운동구역을 분담케 하고 1917년 10월부터 1918년 1월에 걸쳐 광복군 명의로 광복운동 자금제공을 당부하는 권유문을 자본가 및 친일파에 보내고 응분 염출을 권유한 다음 일제관사가 징수한 세금을 압수하며 악질관사 및 계일반역자를 응징하였고 만주에 의병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병자금을 충당제공하였으며 의사는 1917년 1월 남대문 밖 어재하 집에서 중견간부와 합의하여 광영리 앞길에서 대구로 수송 중이던 경주, 영일, 영덕 세 고을의 자금 팔천칠백원을 징수하여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만주에 독립자금을 직송하였으며 1917년 1월 20일 동지 김경태, 임세규를 시켜 친일파 악질관사인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케 하고 또 동년 11월 10일 군자금 모금을 거부하고 구왕실재산을 가로챈 경북 칠곡군 북상면 장승원 집을 습격하여 사형선고문을 낭독케하고 그 즉석에서 처형함으로서 만천하 친일파의 간담을 서늘하게하여 만인에게 경고한 바 있었으며 동년 부장단을 인솔하여 충남 경산 금광을 습격하여 쟁취한 금괴를 만주로 이송하였다.
조선은행권을 정화로 교환하여 군자금에 충당케 하였고 이와 같은 독립운동이 만주 상해를 비롯 전국 방방곡곡에 확산케 되자 총독부는 전국 헌병경찰에 수사망을 펼쳐 광복단 색출에 혈안이던중 1917년 12월 첩자 이종국의 밀고로 김의사는 경성부 종로 어재하 집에서 동지들과 회합중 체포되어 일경의 잔악한 고문을 받고 1918년 2월 1일 보안법 위반 및 총포 화약 취체법 위반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대심원에서 실형 삼년 감형집행 받아 옥고중에서도 1919년 3월 울진, 삼척 만세사건 20여군에서 74회에 걸친 헌병분소 파괴 경찰서 군청, 면사무소 파괴 군경 충돌 사건을 일으키는 등 관동지방 지휘 지시 책임을 물어 공주 형무소에서 연일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1921년 5월 형기 만료 출옥후 즉시 경기부 종로 인사동에 거주하면서 일본에 거주하는 서양선교사 굴피를 통하여 종교자금을 받아 만주에 보내어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였고 1922년 당시 토지개혁구실로 일제가 행한 왕실재산 국유지 측량 박탈 등의 부당성을 주장 총독을 상대로 소송을 제소한 국사범으로 의사는 재차 3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후 1924년 1월 28일 경성부 묵정동 39번지 황금정에서 식사중 일경의 첩자에 의해 독살케 되어 종세하였다.
의사의 부 김시영 선열은 독자 김동호의 국가 독립 운동 자금 모금 협조를 위하여 사재 임야 18정보와 전답 수백평의 리액 사재를 국난회복 투쟁운동 자금으로 광복단에 헌납동시 독립투사 자가은익 독일선교사 굴피 등 보안법 위반 살인방조 죄복으로 1918년 공주형무소에서 2년 옥고중 기미년 독립만세사건을 부자 옥중지휘와 1921년 왜정 토지 개혁 반대로 조선총독을 상대로 제소한 국사범으로 2년 옥고중 왜경의 잔악무도한 고문에 정신이상으로 폐인이 되어 1932년 8월 18일 고종하니, 오호라 군내 유일무이한 부자 양대가문 순국선열의 애국충절의 공훈을 1977년 12월 대통령 표창, 1990년 12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된 바 있는 김동호 의사는 당시 47세에 서거 기세 79년에 이르렀으며 의사의 부 김시영 선열은 기세 71년에 이르러 금번 의사 김동호 사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충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