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행국, 정행돈 추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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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아곡리 309
탐방로그
칠곡군 왜관읍 아곡리 309에 위치한 정행국, 정행돈 추모공원 내에는 정재문 회장 추모비, 정행국 선생 추모비, 정행돈 선생 추모비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정재문 회장은 정행국 선생과 정행돈 선생의 아버지이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곳은 애국지사 정행국 선생의 독립운동 시 은거하시던 곳이라고 한다.
愛國志士 鄭行國 先生 遺址(애국지사 정행국 선생 유지)
愛國志士 鄭行國 先生 遺址
(애국지사 정행국 선생 유지)
정재문 회장 추모비 / 애국지사 정행국 선생 추모비 / 애국지사 정행돈 선생 추모비
정재문 회장 추모비
정재문 회장은 1876년 10월 2일 대구에서 정용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왜관에 와서 정미업이 번창하자 이를 하나님의 은혜라 믿어 천주교 공소를 열고 아들들의 애국 활동을 뒷받침하며 동창학원과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가실 성당 건축을 돕는 한편, 왜관성당의 부지를 마련하고 공사비 대부분을 부담, 1928년 영남에서 대구 계산 주교좌 성당 다음으로 큰 고딕 성당을 세웠다. 왜관 성당의 총회장을 맡아 전국에서 이름만 천주교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소화여자학원 설립에 기여하고 3대 원장을 지냈다. 맏아들을 독립운동에 바친 다음에도 다른 아들들과 함께 평생을 애국 계몽 운동에 헌산하였으며 1945년 해방 후 순심중고등학교 설립 때 전재산을 바치고 1954년 7월 9일 세상을 떠났다. 2010년 광복절에 정재문회장 추모비 건립위원회는 삼가 이 비석을 세운다.
정재문 회장 추모비
정재문 회장은 1876년 10월 2일 대구에서 정용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왜관에 와서 정미업이 번창하자 이를 하나님의 은혜라 믿어 천주교 공소를 열고 아들들의 애국 활동을 뒷받침하며 동창학원과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가실 성당 건축을 돕는 한편, 왜관성당의 부지를 마련하고 공사비 대부분을 부담, 1928년 영남에서 대구 계산 주교좌 성당 다음으로 큰 고딕 성당을 세웠다. 왜관 성당의 총회장을 맡아 전국에서 이름만 천주교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소화여자학원 설립에 기여하고 3대 원장을 지냈다. 맏아들을 독립운동에 바친 다음에도 다른 아들들과 함께 평생을 애국 계몽 운동에 헌산하였으며 1945년 해방 후 순심중고등학교 설립 때 전재산을 바치고 1954년 7월 9일 세상을 떠났다. 2010년 광복절에 정재문회장 추모비 건립위원회는 삼가 이 비석을 세운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로마 2.6)

정재문 회장 경주정씨 양경공파 64대 자 무경 세례명 안드레아
배위 최질라 태원최씨 세례명 오틸리아
대구 천주교 범물묘원 안장
자녀 행국 행본 행모 행숙 행돈 행록 행만
애국지사 정행국 선생 추모비
정행국 선생은 1896년 12월 24일 이 고장의 개척자 정재문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안중근의사의 우국충적에 힘입어 광복의 큰 뜻을 품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서울 숭실전문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자, 1914년 8월 중국으로 건너가, 해외독립운동 기지인 젠다오 지역과 지린성 창춘 등지에서 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 1919년 5월 귀국, 왜관청년회를 조직하고 동창학원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이 독립운동에 진력하도록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1921년 10월 왜관청년회 주최 시국강연회에서 "나의 조국은 죽지 않는다"는 강연을 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같은 달 12일 세상을 떠났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10년 광복절에 정행국선생 추모비 건립위원회는 삼가 이 비석을 세운다.
애국지사 정행국 선생 추모비
정행국 선생은 1896년 12월 24일 이 고장의 개척자 정재문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안중근의사의 우국충적에 힘입어 광복의 큰 뜻을 품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서울 숭실전문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자, 1914년 8월 중국으로 건너가, 해외독립운동 기지인 젠다오 지역과 지린성 창춘 등지에서 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 1919년 5월 귀국, 왜관청년회를 조직하고 동창학원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이 독립운동에 진력하도록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1921년 10월 왜관청년회 주최 시국강연회에서 "나의 조국은 죽지 않는다"는 강연을 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같은 달 12일 세상을 떠났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10년 광복절에 정행국선생 추모비 건립위원회는 삼가 이 비석을 세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정행국 선생 경주정씨 양경공파 65대 별칭 영수 세례명 빈첸시오
배위 이복남 벽진이씨 세레명 수산나
대구 천주교 범물묘원 안장
자녀 한규 혜규 원규
애국지사 정행돈 선생 추모비
정행돈 선생은 1912년 8월 22일 이 고장의 개척자 정재문회장의 4남으로 태어났다. 1931년 일제강점기에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맏형 정행국 선생의 유지를 따라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였다. 1932년 왜관에서 청년동지회를 조직, 농촌계몽과 민족의식 고취 등 항일운동을 하다 1938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 1개월 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5년 해방 후, 순심교육재단 설립 때 재정지원을 하고 1950년 5대 순심중학교장에 취임, 11년간 봉직하였으며, 1952년 순심고등학교를 설립, 초대교장을 맡았다. 1953년 왜관 삼청동 한센인 복지시설을 건립하고 1964년 불우청소년 교육을 위하여 명성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고 2003년 8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2010년 광복절에 정행돈 선생 추모비 건립위원회는 삼가 이 비석을 세우다.
애국지사 정행돈 선생 추모비
정행돈 선생은 1912년 8월 22일 이 고장의 개척자 정재문회장의 4남으로 태어났다. 1931년 일제강점기에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맏형 정행국 선생의 유지를 따라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였ㄷ. 1932년 왜관에서 청년동지회를 조직, 농촌계몽과 민족의식 고취 등 항일운동을 하다 1938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 1개월 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5년 해방 후, 순심교육재단 설립 때 재정지원을 하고 1950년 5대 순심중학교장에 취임, 11년간 봉직하였으며, 1952년 순심고등학교를 설립, 초대교장을 맡았다. 1953년 왜관 삼청동 한센인 복지시설을 건립하고 1964년 불우청소년 교육을 위하여 명성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고 2003년 8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2010년 광복절에 정행돈 선생 추모비 건립위원회는 삼가 이 비석을 세우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요한 4.16)

정행돈 선생 경주정씨 양경공파 65대 호 지원 세례명 미카엘
배위 최재경 월성최씨 세례명 발바라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안장
자녀 은규 송규 죽규 신규 정혜 오규 완규
선열들이시여 우리나라를 보우하소서
칠곡군 왜관읍 아곡리 309 애국지사 정행국, 정행돈 추모공원을 찾았다.
애국지사 정행국 정행돈 추모공원
애국지사 정행국 정행돈 추모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