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수 순국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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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월정리 518-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북 청송군 현서면 월정리 만수농원 내 항일의사 두암 김재수 선생 순국기념비를 찾아왔다.
抗日義士 斗岩 金在水 先生 殉國紀念碑
(항일의사 두암 김재수 선생 순국기념비)
맑은 산수 아늑한 이곳 월정리는 대한제국 말기 항일 구국전선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순국하신 항일의사의 유허지다. 산남 의진에서 김두암 장군으로 불리어진 공의 휘는 재수요 자는 문수이며 호는 두암으로 의성인이니 신라 경순왕의 자 의성군 휘 석의 후손으로 9세의 휘 용비는 태자담사하시고 12세의 휘 광부는 병부상서요 향시조 휘 한경은 호 도곡으로 중종조 청국 원종공신으로 자헌대부였으니 공은 13대손이다. 조는 휘 지헌이요. 부는 휘 항희이의 모는 함안조씨 휘 기구의 녀로 1896년 3월 1일 청송군 현서면 월정리에서 출생하시니 2남 5녀 중 말자였다. 공은 일찍이 휘 상희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 재명이원근에 자자하였고 천성은 중후하였으나 불의에는 타협이 될 수 없는 굳센 기질을 지녔고 체격 또한 거구로서 일찍부터 학사 또는 장군으로 불리워졌다 한다. 인품은 호걸 스러웠으며 또한 포부는 웅대하여 항상 청운의 꿈을 품기도 하였으나 세상은 왜적들의 침략으로 점점 국운이
기우러져 친일파로 인하여 을사조약이 맺어져 국권이 송두리 채 빼앗기자 이를 본 도찰사 정환직 선생이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아 장자 정용기를 영남에 파견하여 영천에서 산남 의진이 창군된다는 소식을 접하자 국운은 항쟁의 성패에 달려있다 하며 내가 갈 길은 바로 여기에 있도다 하고 전재국 수국과 더불어 의진으로 달려가서 단하에 사맹하고 입지나여 병력모집 및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일방으로 월정곡에서 화약을 제조하여 의군에 보급하는 등 다방면의 창군활동을 하였다. 항쟁으로 들어가자 항상 진두에서 활약하여 청하읍 전투 흥해읍 전투에서 대승하고 영천 자양면 전투에서는 왜장을 사살하였다. 신녕과 의흥 의성 등지의 주둔왜군을 습격하고 안덕 신성에 래습한 왜적을 격퇴하였다. 그 후 영일 죽장 매호리에 유진중에 습격해온 왜적들과 입암에서 접전 중 불행히도 정용기 대장 이하 제장들이 전사하므로 파진되었으나 도찰사 정환직직 선생이 재거하여 친히 의진을 영도하자 운주산 전투 파계산 전투 비학산 전투 조천전투 달성 전투 등지에서는 선봉장을 맡아 활약하였다. 그 후 청송 서부진에 배속받아 의성지방을 이진중 왜적들의 총 공세로 퇴로를 차단 당하여 고전하자 부하 40여명을 지휘하여 포위망을 벗어나게 하고 자신은 체포되어 대구 옥에 투옥 된 후 왜적들의 만단유설을 뿌리치고 1909년 3월 4일 대구지법에서 소위 강도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고등법원에 항소하자 동년 4월 8일 항소를 기각하고 사형으로 형을 변경하여 6일 복중에 참수 순국하하였다. 이 비보를 접하자 김재원 재사 진효 등이 대구 형장에 가서 처형당한 시신 중 출전전에 부인께서 표시해 둔 옷을 보고 수 없는 시신을 찾아 3일낮 3일밤을 솔가지를 꺽어 파리떼를 쫓으며 운구하여 향목으로 수를 제작 합신하여 월정리 산 2031번지 화전곡 임좌원에 안치하였다. 배위 파평윤씨도 왜적들의 고문 여독으로 1911년 5월 생을 마
침으로 후대 없이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문내에서는 조카 진효를 양자하여 양호 문호 2자를 두어 후세를 이었으며 또한 주민 장룡암 등 40여명이 모여 공의 순국 정신을 기리는 숭의계를 조직하여 매년 12월 15일에 추모 행사를 하고 있다. 이에 정부에서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1508호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아! 그로부터 통한의 세월이 공의 묵우의 회천일사 유풍세월을 돌에 새겨서 선혈 젖은 이 곳에 세워 건곤 천추에 전하노니 님의 넋이 깃드시어 길이 이 강토를 지켜주시고 겨레의 전도를 밝혀주소서.

서기 2008년 11월 27일 기념사업추진 손 양호
자료수집 족손 수남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