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욱 순국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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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 540-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조현욱 선생은 앞서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 가마소바위 위 목산 조선생 순절비에서 소개를 했었다.
이곳 이외에 대구에도 순국기념비가 있다고 되어 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牧山 趙炫郁 先生 殉國紀念碑(목산 조현욱 선생 순국기념비)
맥맥히 이어내린 겨레의 얼이 선비의 매운 뜻으로 꽃피어 충절과 효성의 열매가 거룩하다. 1919년 3.1의거 때 이 곳 화목에서도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민중의 함성이 진동하였으니 앞장서 왜적의 총칼과 맞선 이가 곧 조현욱이다. 여기 돌에 새겨 그 넋을 기린다.
1860년 1월 2일 대구 원대리에서 함안조씨 집안에 태어나니 자는 인오며 아호는 목산이다. 부친은 명화며 모친은 광주이씨인데 백부에게 양자온지라 생가 아버지는 교화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다. 단종 임금 시절 절의로 이름 높은 생육신의 한 분인 조 여의 15대 손이며 사도세자의 변고때 홀로 죽음을 무릅쓰고 감영에 나아가 통곡하여 절절한 충성이 후세의 거울이 되고 있는 춘경은 5대 조부이다. 두 집 어버이에게 바친
정성이 하도 극진하여 어머니 편찮을 때 날아가던 매가 꿩을 떨어뜨려 약에 쓰이도록 하였고 또 한번 어머니 병환에 구해도 없던 오계가 저절로 걸어들어왔으며 천 리 먼 땅 한양에서 꿈으로 부친의 위독함을 느껴 밤낮없이 길을 재촉하여 돌아왔으니 하늘이 아는 효성이라 하였다. 1894년에는 데리고 있던 노비들에게 논밭을 나누어 주고 해방시켰으니 역사의 흐름에 앞선 만인 평등의 어진 마음이 아닌가 왜적의 침략이 심해지자 보현산 깊은 골짜기 현서 수락동에 숨어들어 스스로 소먹이고 나무하여 목사이라 일컬었다. 농사짓기를 연구하며 산을 가꾸고 과실나무를 많이 심어 다 함께 잘 사는 길을 찾았고 원근의 젊은 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착하게 이끌었다. 나라 잃은 설움을 뼈골에 새기고 겨레 위해 주지 못해 한 이더니 3.1의거의 봉화가 타오르자 분연히 일어섰다. 동지 조병국 신대휴와 함께 격문을 돌려 1919년 3월 26일 수백 명 군중이 이 곳 화목장터에서 원수에게 항거하는 만세를 외쳤고 독립을 부르짖는 깃발이 노도를 이루었다. 왜경에게 달려들어 주동자는 바로 내라고 꾸짖어 서릿발 같은 기품을 보였다. 이튿날 27일에 동지 조병국이 뒤를 이어 또 한차례 이 장터에서 민족의 정기를 떨치었다.
두 해의 옥고를 겪은 뒤 1922년 2월 19일 새벽 수락동 가마소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예순 세해로 광복의 한 맺힌 이승을 버리었다.
장한 기백 보현산에 울리고 맑은 절개 낙동강에 여울지니
겨레에 바쳐 충성이요. 어버이를 섬겨 효성이라. 노예를 풀어주고 이웃을 보살펴 이끌었으니 크고 깊은 사랑의 실천자이며 참다운 선비다.
길이 이 곳에 지켜 서서 나라의 앞길을 밝히리라.

1983년 4월 5일


獄中詩(옥중시)

五百由來尙義人
一朝胡爲犬羊民

天日無光如此地
寧爲蹈海不爲臣


遺詩(유시)

寧爲踏海不爲臣之句
今將副矣覔屍於釜淵
경북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 현서고등학교 앞 목산 조현욱 선생 순국기념비를 찾아왔다.